
김 홍 규 세무사
20세기의 현대 사상사 내지 철학적 담론의 흐름을 가른다면 196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의 사상은 우리와 동시대적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의 초기에 역사학자인 토인비가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래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예술의 문화, 철학·신학·역사학의 인문학, 사회학·정치학·법학 등 사회과과학과 자연과학 심지어 스포츠학까지 전 부문에 걸쳐 폭넓게 융합되고 있다.
이는 1960년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여성운동·흑인민권운동·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전위예술 등의 문화운동, 그리고 해체 혹은 후기구조주의의 철학적 사상으로,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는 한 시대의 이념으로 자리 잡아, 그 후 점검과 반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혹자는 이 시대의 ‘인식의 틀’이고 ‘창문’이라 비교한다(김욱동). 이는 탈이념, 다양성, 다원성, 무정부상태, 비합리성, 불확정성, 해체주의, 후기구조주의 등의 핵심 키워드로서 시대의 유령처럼 떠 다닌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포스트모더이즘의 창문을 통하지 않고 세상의 담론을 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특히 철학 및 사상적으로 후기구조주의이념의 깃발을 달고 나아가는 이 시대의 대표적 아방가르드(전위前衛)는 J.라캉, M.푸코, J.데리다, C.래비스트로스 등이며 이들은 기존사유를 해체한다.
2005년 BBC에 의해서 전문가가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인 ‘마르크스’는 일찍이 종래 서구적 로고스 중심과 신중심의 사회를 해체하여 변증법적 유물론방법으로 자본주의를 해석했다.
자본(가)보다 노동(자)에 관심을 가져 생산은 곧 노동이라는 등식을 내세운 맑시즘(1867), 신은 죽었다는 명제와 ‘힘에의 의지’의 니체철학(1885), 프로이트의 무의식(1900), 이 세 철학은 현대철학의 원천으로서 과히 혁명적 사상이라 일컫는다.
‘바타이유’는 주저 ‘에로티즘(1957)에서 사치, 놀이, 전쟁, 예술, 희생제의, 축제, 섹스, 도박 등 비생산적 소비가 인류의 생존조건이라 규명하고 부정적인 소비에 대해 소위 인류가 버려야 악을 꽃으로 재탄생시키며, 라깡은 프로이트를 승계하여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라면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묘사하며, 욕망의 본질을 타자의 욕망으로 배치하고 이성바깥에 머무는 욕망을 이제 관심의 대상으로 끌어 들인다.
레비스트로스(1955)는 현대사회가 미개사회를 어떻게 억압했는지 그 이분법을 해체시키고, 토마스 쿤(1962)은 과학적 지식을 절대적이라기보다는 혁명을 거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그 시대의 공유가치로 전락시킨다.
푸코는 서양문명이 오랫동안 견지해온 합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하고 비합리적 내지 비이성적 사고인 광기에 대하여 역사적 관계를 해체한 후, 이성과 광기를 우열 없는 서로 다른 사유 방식으로 재편하고 광기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였다. 또한 ‘처벌과 감시(1975)’에서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한 법률과 억압적 통치구조를 ‘의지 대 권력’으로 파악하여 지식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문화체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식은 권력과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지식은 정치적이다’이라는 테제아래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심지어 동반자라고까지 말했다.
후기 구조주의의 최전방에 있는 해체철학자 데리다(1967)는 서양 철학의 음성중심주의를 확인하고 그 속에 서구의 민족중심주의를 폭로하면서 말하기가 글쓰기를 억압했고, 이성이 광기를, 주체가 객체를, 선이 악을, 삶이 죽음을, 본질이 현상을, 필연이 우연을, 동일성이 차이를 억압하였는지 그 구조를 해체하고 ‘차연(차이)’으로 구명하여 권력을 위해 성립된 억압과 배척을 조명한다. ‘해체’란 서구철학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그 개념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철학적 시도로 각 분야에서 새로운 탈이념이 배이게 된다.
따라서 후기구조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은 기존 또는 근대의 도그마(명제)에 대한 일종의 반란이고 반기이며, 이념논의의 주체는 그에 참여하는 ‘지금 이곳의’‘우리’라는 명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듯 서구의 근대적 정신과 문화, 사회적 구조와 체제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사상적 경향이 오늘의 주류적 흐름이라면 지금 여기의 우리 조세분야에도 그 이념과 사상이 배어 들만도 한데, 조세 지성계에서는 그러한 사상적 산봉우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듯 하다.
필자는 2009년 ‘조세법철학과 세무문제’를 발표한 일이 있었다. 자연인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응앙’소리가 발화되므로써 살아 있는 생명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조세는 어떻게 태어 나는가? 만들어진 조세법률안을 국회의 ‘입법망치’로 두드림으로서 태생하게 된다. 즉 법치국가에서의 조세는 ‘법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세법전문가가 조세원칙에 입각하여 타당한 법 또는 정의로운 조세법으로 태어 날 때 비로서 조세정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조세정의는 조세원칙’이란 명제를 얻는다.
그러하면, 조세법률안은 확립된 조세원칙의 틀에서 논의되어야 하고, 이점에서 조세원칙은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투영되는 틀로서 활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인류역사상 인권적 담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활발히 다루어져 왔음에도, 개인의 경제행위와 재산권을 대상으로 그 일부를 떼어 내는 국가의 조세에 대한 해명적 담론은 상대적으로 빈약하였다. 따라서 조세실체에 대한 근본적 명제를 해명하고 비판하는 조세법철학의 담론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조세이데올로기 내지 그 접근적 사고방식은 어쩌면 거대한 기계적 구조망속에서 일방으로 작동하는 조세구조주의라는 메카니즘에서 고착되고 구조화 되어 그 주름을 가진다고 보아 진다. 단순히 있는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현실태를 넘어서는 상황은 고려 될 수 없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최고의 이념가치인 조세정의라는 큰 문제는 제쳐 두고 지엽적인 문제에만 매달리는 꼴이 될 것이다. 한계를 넘어 초월적인 것을 건드릴 때만이 비로서 보여 질 수 있다면, 현재 고착화 된 몇가지 근본명제를 초월적, 탈이념적 자세로 체계를 해체화하고 해명하는 방법이말로 진정 조세분야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가 아닐까 한다. 혁명적이거나 해체적일 수 있는 사고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본다.
첫째, 조세부담에 대한 임계점은 어디까지일까? 정부가 필요하다면 무한정까지라도? 이런 근본적 논의는 왜 하지 않을까. 가산세를 포함한 세액의 크기를 가늠하는 세율의 한계점은 어디까지가 적정한가이다. 최근 양도소득세중과세율과 과중한 가산세의 논의와 더불어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둘째, 언제까지 조세입법권을 당사자(납세의무자)가 배제된 채 비전문가가 대부분인 국회에 둘 것인가? 그리고 또 한편, 납세의무자의 조세에 대하여 세금 대부분을 부담하는 사업자 내지는 사업자단체와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한계속에서 때로는 적대적일 수 있는 근로소득자의 주장에만 매몰되어 휘둘려야 져야 하는가? 최소한, 납세의무를 이행하는 신고절차에 관한 조세법안만이라도 세금을 내는 당사자이고 묵묵히 순응하는 그들의 손에 자유로히 맡겨둘 가능성은 전혀 없겠는가?
셋째, 소득계산에 있어 사업주자신이 가진 노동의 양적 질적가치는 왜 공제되지 않는가? 노동의 가치는 투하된 시간과 노동의 강도로서 등치된다면, 중소기업 개인사업주의 투하된 양과 질의 노동가치는 일반에 비해 훨씬 높으나 명목상 지출되는 비용이외 질적인 노동가치는 인정받지 못하고 차별될까?
넷째, 조세정책적 목적을 위해 많은 조세특례제도를 인과적 관계로 유인하고 있지만, 기업은 오히려 미리 경영계획에 포함되어 있거나 주목적을 위해 활동한 결과로서 얻어진 부수적 과실을 덤으로 받는 상관적 결과물일 뿐 그 이상은 아니지 아닐까? 또한, 설사 많은 조세특례에 대해 정부의 조세홍보를 신뢰하고 기업경영정책으로 채택한 인과적 행동이라도 최저한세 때문에 칼질당하여 조세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는 일종의 사기이고 기만으로 느껴지지 아니할까?
다섯째, 자본주의 시대의 현대국가는 국고 조달이라는 조세의 본래적 기능 이외에도 국민의 소득재분배기능에도 탁월함은 분명하다. 한편, 사업주가 매월 부담하는 4대 공적보험은 당초 국민의 복지를 위해 수익자부담원칙으로 예산의 공백을 메워 왔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공적보험료의 그 대상과 부담이 현저하게 확대되어 영세자영업자의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는 조세수입의 일부로서 영세자영업자의 4대 보험으로 충당하여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헌법상 의무가 아닌가?
전면적 수익자부담원칙이라는 명제속에서 1인 이상 고용하는 의무사업장의 4대 공적보험료는 조세에 버금하거나 그 이상으로 무겁게 체감하고 있지만 정부에서는 복지와 소득재분배기능만을 역설하고 있다. 진정한 소득재분배기능을 다하고자 한다면 전체소득에서 조세와 준조세 등을 차감하여 실질적 가처분소득을 두고 소득재분배의 기능 유무를 따질 수 있을 것이다. 주관기관도 다르고 단순히 같은 소득에 누진세율의 조세 계산원리와 준조세인 4대보험료를 통합하지 않고 현재와 같이 별도에 의해 관리되는 시스템을 해체해봐야 하지 않은가?
여섯째, 법 자체가 지향하는 목표는 예측가능하고 법의 안정성을 위해 존재의의를 가진다고 한다면, 재산권의 침해적 속성을 가진 조세에 대한 세법개정은 최소한의 여유시간도 없이 매년 연말 심지어 12월 31일 자정 무렵 입법되어 바로 시행되고 있는 모습에서 과연 그러한 법이 타당하고 실질적 효력을 가질 수 있다 하겠는가?
일곱째, 수많은 종류의 가산세와 일률적 부과기준인 가산세율의 적정여부에 대해서 어떤 근거로 어떤 방식의 틀에서 구현되었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은가? 본세 보다 오히려 가산세가 더 많다면 그 합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왜 규모별 능력별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가를 해체보아야 하지 않은가?
19세기 초 종래의 이성, 형이상학, 카톨릭 신중심의 서양사회를 전복하여 자본주의 속에 상품생산의 노동을 중시하고 노동가치설을 주장한 마르크스의 맑시즘이 혹자는 20세기 후반부에 무너진 공산주의와 함께 세기의 종말을 고했다고 하였지만, 철학자 데리다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부작용으로 새로운 막시즘의 유령이 이 시대를 배회하고 있다고 한다.
조세지성계는 아직 마르크스가 오지도 않았고 따라서 막시즘의 유령도 없는 오늘을 진지하게 생각하여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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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신문 제609호(201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