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판사가 부동산 명의신탁 제도를 인정한 대법원 판례를 비판하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부동산 시장에 만연한 명의신탁 관행이 바뀌는 계기가 될지, 향후 상급심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된다.
◇ 대법원은 명의신탁 인정 = 대법원은 헌법상 사적 자치(私的 自治)의 원칙의 하나인 계약자유의 원칙을 근거로 개인 간의 명의신탁 약정은 유효한 것이라는 판례를 고수해 왔다.
이 때문에 남의 이름을 빌려서 거래해도 유효하다는 명의신탁 제도는 비록 목적이 불법적인 것이라고 해도 법원에서 효력이 인정되면서 부동산 시장에서 많은 폐단을 낳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경기 변동 등을 감안할 때 부동산이 다른 자산에 비해 안전한 투자 수단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명의신탁은 투기 및 탈세의 수단으로 변질됐고 이를 막으려는 법률이나 행정조치는 대법원 판례 앞에 무기력했다.
대법원의 판례를 보면 강제집행 면탈(免脫)이나 조세포탈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도 불법원인급여가 아니라거나 민법 제103조에 규정된 `반사회적 법률행위'로서 무효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개인 간 어떤 법률행위가 행해져 효과를 인정할 경우 헌법의 기본원리나 공익에 배치되거나 실질적 불평등을 초래할 때 민법상 반사회적 법률행위 규정을 근거로 효력을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불법 목적의 명의신탁 자체를 부정할 경우 채권자도 해당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할 수 없게 되므로 채권자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점 등 다양한 논거를 제시해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물론 이 같은 판례에 대해 법원 내에서 여러 형태로 문제가 제기됐고 1995년 부동산실명제의 도입은 법원 판결로 용인된 옳지 않은 관행을 제도적으로 개혁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동산실명제 실시 이후에도 법원은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라 성립된 명의신탁이 유효하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수탁자가 배신 행위를 할 경우에 반사회적 법률행위로 판단, 오히려 신탁자의 재산을 보호하는 입장을 지켜왔다.
◇ 하급심 상소 안돼 판례 변경 논의 불발 = 하급심에서는 대법원의 판례에 대해 꾸준히 반론을 제기했지만 대법원까지 상소(항소ㆍ상고)되는 사례가 없었다.
조희대 현 부산고법 부장판사나 지법 부장판사 출신의 한기춘 변호사 등 법조계 안팎에서 하급심 판결이나 각종 논문을 통해 대법 판례의 문제점을 줄기차게 지적했다.
2003년 서울중앙지법 민사20부(조희대 부장판사)가 명의신탁에 따른 소유권이전등기의 말소를 청구한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린 것이 대표적인 최근 사례이다.
재판부는 "명의신탁은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로서 무효이다. 명의신탁 약정이나 이에 따른 등기를 무효라고 보는 이상 명의신탁자의 말소등기 또는 이전등기 청구는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조 부장판사는 당시 판결문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허용할 수 없다. 이러한 해석은 새로운 사회질서 확립을 위해 필요하다"며 "사적 자치라고 해서 무제한의 자유방임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명의신탁을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로 봐야 하는 이유는 도박에 관련된 금전의 대여나 이중매도와 비교해 봐도 분명하다"며 "부동산실명제는 투명한 거래질서를 확보하고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명의신탁자에게 민사상의 구제를 허용하면 부동산실명제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법원은 명의신탁자가 부동산실명법에 위반된 명의신탁 약정이나 등기의 무효를 구하는 어떤 민사상 청구에도 협력을 거부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 판결은 원고측이 항소를 포기해 확정되는 바람에 상급심이 판단할 기회가 없었고 상소가 없어서 판례 변경을 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판결이 항소심을 거치면서 대법원까지 가거나 유사 판결이 이어질 경우 어떤 형태로든 대법원의 판단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 유사 판결이 계속돼 대법 판례 변경으로 이어질 경우 부동산 시장의 명의신탁 관행에 일대 변화가 올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서부지법 이종광 판사는 "그동안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판례를 통해 입장을 정리할 기회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 문제가 논의될 시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