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은 인간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과거 왕과 도시 상인들에게 부의 원천이었다.
잦은 전쟁과 사치스런 궁정생활이 절정에 달한 절대주의 시대에는 소금세가 왕실재정의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프랑스 루이14세의 재상 콜베르는 프랑스가 합병한 지역에 소금세를 징수해 주민들로부터 격렬한 원성을 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소금세를 징수하지 않는 대신 세금을 많이 낸 사람에게 귀족 작위를 부여하는 유인책을 쓰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산업과의 경쟁에 밀려 저조해진 소금생산에 투자를 장려하고자 했는데 이런 조치는 정책의도대로 영국의 소금산업을 활성화 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한편, 비폭력 불복종 인권운동가 마하트마 간디는 소금세 반대를 통해 폭력을 쓰지 않고 영국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실천하는 세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간디는 1930년 3월 12일 영국의 소금세 부과에 대한 항의로 79명의 신청자와 함께 ‘소금행진(Salt March)'을 시작했으며 25일 동안 수 천명이 그와 함께 했다.
4월 6일 인도 서부 단디 해변에 도착한 이들은 무수한 영국 경찰의 곤봉 세례에도 불구하고 바닷물을 손에 적셔 말리는 행위를 계속했고 적은 양의 소금이지만 직접 추출하는 행위를 보여주었다.
이 운동은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뒀고 6만명 이상이 투옥됐으나 인도 국민들에게 스스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세계적으로 인도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1년 뒤 간디는 어윈 총독과 협상하여 반영(反英) 불복종 운동을 중지했으나 간디-어윈 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 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 간디는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했고 1934년 국민 회의파의 지도자 자리를 사임했다.
이후 그는 세바그람에 가서 살면서 농민을 교육하고, 하층민을 위해 투쟁하며, 교육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등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다.
세무사신문 448호(2006.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