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가 임명한 공기업 사장들은 퇴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부와 여권 내부에서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와 유인촌 문화체육부장관에 이어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도 12일 기자들과 만나 이전 정권에서 임명된 공기업 사장들은 물러나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임원추천위원회, 공공기관운영위원회 등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임됐고 관계법령과 정관에 임기가 보장돼 있는 상황에서 정권 변경을 이유로 자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또다른 낙하산 인사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근본적으로 공기업은 국민의 재산이지, 정권의 전리품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선임과정 자체가 무늬만 공모이지 낙하산 인사였으며, 공기업은 정부의 정책적 수단이라는 점에서 부적합한 인사는 퇴진해야 한다는 견해도 많다. 코드가 맞지 않는 인사들은 새 정부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다.
◇ 거세지는 퇴진 압력
한나라당의 안 대표가 먼저 공기업 사장들에게 포문을 열었다.
그는 11일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 "지난 10년간 국정을 파탄시킨 세력들이 야당과 정부조직, 권력기관, 방송사, 문화계, 학계, 시민단체 등 각계의 요직에 남아 새 정부 출범의 발목을 잡고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며 물러나라고 압박했다.
유 문체부 장관도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80회 아침공론에서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며 참여정부에서 '코드인사'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임명된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에 대해 퇴진을 요구했다.
그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나름의 철학과 이념, 자기 스타일과 개성을 가진 분들로,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 지식경제부 장관은 같은 날 정부 과천청사 인근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난 정권 임명인사들의 퇴진을 거론한 안 대표의 발언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안 대표 발언은) 일면 타당성이 있다"며 "코드가 다른 사람들이 임기가 남았다고 해서 전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있는 것은 곤란하다"고 답했다.
◇ 퇴진요구 타당한가
문제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공기업 사장들이 물러나야 한다면 이 역시 또다른 낙하산 인사에 해당된다는데 있다. 공공기관운영법 등에 명시된 절차를 사실상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공기업 사장과 감사는 임원추천위원회와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거쳐 임명된다. 임원추천위는 비상임이사와 이사회가 선임한 위원 5∼15명으로 구성된다. 위원에는 해당 기관 사원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인물이 들어간다. 공공기관운영위는 법조계.경제계.언론계.학계.노동계 등 각계 인사 20명 이내로 구성되며 임원추천위가 복수로 올린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벌인다.
원구환 한남대 행정학과 교수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만들어진 제도와 절차에 따라 임명된 공기업 사장은 조직.경영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면서 "아니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장도 바뀌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몇 년간 공기업 사장 임용 관련 제도가 임기도 존중해주고, 절차도 지켜지는 쪽으로 개선돼 왔다"면서 "그동안 지켜온 절차를 깨고 뒤엎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늬만 공모인 절차를 거쳤고 내용적으로는 낙하산에 해당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형식논리에 치우칠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준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공기업 사장과 감사들이 적법한 절차를 밟아 선임됐으나 실제로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다"면서 "공기업은 정부의 정책수단으로 활용되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현 정부와 충돌이 있는 사람의 경우 교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모든 사장과 감사들에게 물러나도록 하는 것보다는 그동안의 성과, 업무 성격 등을 감안해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밝혔다.
◇ 물갈이 총선이후 현실화 전망
연합뉴스가 분석한 결과, 주요 26개 비금융 공기업(공석 1개 제외)의 사장(이사장)들 가운데 당직이나 선출직을 역임해 정치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사는 7명이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공직자 출신으로 총선 등에 출마했거나 출마를 '저울질'했던 인사, 정치권과의 상당한 인연이 있던 인사들도 존재한다. 이들이 새 정부의 산하기관 물갈이 1순위가 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물론 이들 외에도 순수 기업인 출신도 5명이며 나머지 인사들도 관련 부처에서 고위 공직을 지낸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금융 공기업의 경우는 국회의원을 역임한 한이헌 기술신보 이사장이 있지만 한 이사장을 포함해 전원이 기본적으로 경제관료 출신이다.
그러나 고위 공직자나 기업인 출신 인사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이전 정부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물갈이 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상당수가 공모직으로 뽑히기는 했지만 이들도 정치권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낙하산'이란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천 관가에서는 안상수 원내대표에 이어 유인촌 문화,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이어지는 현 산하기관장들에 대한 '연타석 압박'이 내달 총선 이후 실행으로 구체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총선 이후 새 정부의 정책구도가 본궤도에 오르고 동시에 새 정부 인사들과 정부 조직개편 과정에서 나온 고위 공직자 등의 인사수요도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공기업 등 공공기관에 대해 진행중인 감사원의 대대적 전면감사의 결과가 물갈이의 명분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기업과 공공기관, 준정부기관은 ▲시장형공기업 6개 ▲준시장형 공기업 18개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 13개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 64개 ▲기타공공기관 197개 등 298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