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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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 想> - 소나무
임신빈 세무사

 

요즈음 나는 산책을 즐기고 있다. 주중행사처럼 공휴일이 다가오면 가까운 곳 의산책로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려 본다.

 

어린이대공원은 걷는 길이 모두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 놀이기구들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더 시끄러웠고 아이들로 번잡스러워 호젓한 맛이 없었다.

 

경복궁은 민속박물관, 국립박물관이 있고 때마침 김홍도의 민화전시를 감상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의 산책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깨끗하게 복원된 고궁을 돌아보며 경회루를 바라다보는 정취가 그런데로 좋게도 느껴졌다.

 

창경궁은 우리집에서 교통도 편리했다. 궁문을 들어서서 큰 원을 그리듯 궁전주변을 거닐었다. 빗자락이 스쳐간 흙길에는 빗자락 무늬가 남아있었다. 촉촉한 흙길을 거닐면 발끝에 와 닿는 촉감이 명쾌했다. 비가 내린 다음날의 흙길은 한층 더 차분했다. 까치가 날아다니고 이름모를 작은 새들이 지저귄다. 철죽꽃을 비롯해서 가지각색의 꽃 봉우리들이 고개를 빠꼼이 내밀고 세상구경을 하려들고 있다. 연못 가운데에 정자를 지어놓고 장고치고 춤추고 음식을 팔던 광경도 보이지 않았다. 철창우리속에 갇혀있던 동물들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밤 벚꽃놀이로 북새통을 이루고 화려함을 자랑하던 벚나무들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 자리에는 소나무며 느티나무 등 다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30여 년 전에 보았던 창경궁이 아니었다. 나무들은 우리가 갈 때마다 계절의 변화를 새롭게 느끼게 하며 아직도 냉냉한 기온인데도 봄기운을 느끼게 했다. 회색빛 산토끼가 인기척에 놀란 듯 쏜살같이 달려서 나무 숲 사이로 자취를 감추고 다람쥐, 오솔이가 이리저리 오르고 내리는 모습에서 뒤를 쫓아 같이 달리고 싶은 동심을 일게 했다.

 

나에게 적합한 창경궁의 산책로를 알아낸 것은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촉촉한 흙 길을 걷는 맛도 좋지만 인적이 드물어 한적한 숲길을 남편의 손을 잡고 거니는 맛이 더 좋았다. 맑은 공기를 마음껏 호흡할 수 있었고, 자동차의 소음도 들리지 않아서 좋았다. 나무들은 남의 것을 탐내지 않으면서 자기 스스로의 목표를 향해 자라가고 있었다. 딱딱한 콘크리트 포장길이 도시의 길이라고 한다면 부드러운 흙 길은 시골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대도시속에서 숲이 우거진 시골길을 거닐 수 있다는 게 복이 아닐 수 있겠는가? 복은 스스로 는 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이러한 조용한 흙 길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 다녔었다. 행복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가까운 자기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관광버스를 타고 먼 곳을 헤메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 좋은 산책로를 발견한 것이다. 이 흙 길은 선조 왕가에서 후손들에게 물려준 문화유산에 보태서 덤으로 내려주신 하사품이 되는 셈이다. 내가 창경궁을 더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흙 길과 더불어 노송에 매료된 때문이다.

 

중전이 거처했다고 하는 통명전과 왕이 기거했던 영춘헌 앞뜰과 뒤뜰, 환경정, 함인정 주위에 있는 노송들이 더 돋보였다. 이곳저곳에서 고궁과 어우러져서 위용을 자랑하고 서 있는 노송들에게 마음을 빼았기며 한나무 한나무 감상에 저져 드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이 각각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저마다 다른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듯이 소나무들도 저마다의 특색을 보이면서 힘차게 뻗어 수백여년의 세월을 모진 비바람, 눈보라를 이기며 말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인내하면서 푸르게 자라고 있는 모습이 장하게 보였다. 그들 중에는 백송도 홍송도 섞여 있었다.

 

어느 노송은 바르게 자라다가 30도 정도 휘어져서 많은 세월을 보내고 다시 하늘을 향해 솟아 올라간다. 사람이 살아가다 모진 세파에 시달려 쓰러질 듯하다가 칠전팔기의 의지로 일어선 용감하게 재기한 사람을 연상케 했다.

 

또 어떤 노송은 많은 세월은 우람하게 곧게 자라가다가 번창했던 세월은 뒤로 한체 끝에 가서는 동·북·서쪽 가지가 어떤 사연으로 잘려나갔는지 그 자국에는 시멘트가 아픈 상처를 감추어 주고 있고 남쪽을 향한 작은 가지 하나가 살아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마치 한 가정이 복을 누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다가 알 수 없는 어떤 액운을 물리치지 못해 한꺼번에 가족을 먼저 보내고 죽지못해 살아가고 있는 어느 독거노인 혹은 고아를 닮은 듯한 모양새로 느껴졌다.

 

또 한 노송은 땅에 닿을 듯 쓰러져 가고 있어 받침목으로 겨우 지탱시키고 있는 나무도 보였다. 이 나무는 음성 꽃동네 노인병동에서 자기 의지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가련한 노인을 연상케 했다.

 

수십 여년 자란듯한 한 소나무는 초년에는 한줄기로 곧게 잘 자라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두 줄기로 갈라져 자라다가 말년에는 머리부분까지 둘 다 짤렸고 그 두줄기마져 엿가락을 비틀어 놓은 듯 비틀려진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준 것에 감사함을 일게 했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저렇게 어우려져서 독야청청 푸르름을 자랑하고 서있는 수백그루의 소나무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이 당긴 노송 앞으로 걸어갔다. 당당하고 반듯하게 자란 모습과 동서남북 적당이 특색있게 가지가 힘차게 뻗어있었고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기풍당당함에 심취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주 멋지게 잘 생기고 인품이 훈훈해 보이는 노신사를 닮은듯한 노송이었다. 이는 마치 풍체당당한 노인이 후손들을 고루 잘 키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듯한 위인처럼 멋스럽게 느껴졌다. 나도 저 노송을 닮아갈 수는 없을까?

 

나는 두손을 벌리고 손가락을 펴서 그 노송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솔잎향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소나무의 기가 사람에게 좋다고 하지 않는가. 인격이 고매한 사람과 가까이 하고 싶은 심정처럼 이왕이면 기풍당당한 소나무의 기를 받고 싶어서였다. 한편 부러움에서였을까.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주변에 있는 어린 소나무들과는 다르다. 오랜 세월을 참고 견디고 수용하면서 향기도 내고 영원함도 보여주고 의지와 희망을 품은듯 꿋끗이 자라서 고궁을 지키고 있는 그 기백만으로도 존경의 마음이 갔다. 우리 젊은이들도 노인을 대할 때 그분의 과거의 삶이 어떠하던 오랜 세월 세파에 견디면서 모든 것을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수용하고 인내하느라 주름진 얼굴, 노송을 닮은 노인들께 무조건 경의를 표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홍화문을 나섰다.

 


제 345호 (2002.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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