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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想〈임신빈 본회 이사〉 "한잔 더"

 

오늘도 전일처럼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려고 할 때 남편이 다정 하게 다가와서는 애처가인양 어깨를 주물러주는 시늉만 하면서 “오늘 안주는 무었이 있어?”한다. 저녁을 들기에 앞서 남편은 꼭 반주 를 해야 하는 것이 철칙처럼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다. 밥반찬보다도 술안주가 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건너면 안될까요?”하고 말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반주는 건강에 좋고 혈 액순환에 좋고… 좋고”를 늘어놓는다.잠이 안와도 한잔, TV에서 술마시는 장면이 나와도 한잔 해야 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즐긴다.

남편이 젊었을 때는 맥주 한잔만 들어도 얼굴이 빨개지고 소주 한 잔에 쓰러져 술친구들 앞에 혼자 잠들곤 했던 사람이다. 계절의 흐 름속에서 나뭇잎의 색깔이 변해가듯 풍진세상을 겪어서였을까. 나이 가 들어가면서 체질의 변화가 왔다. 남편 친구분들은 전에 잘 마시 고 많이 마셨던 자기네들은 지는 해고 남편은 떠오르는 태양이라면 서 술을 권해댄다. 몸상태가 소주 한병의 양도 감당하기 어려운 친 구들이 많아지는데 남편은 전과 반대로 소주 두병쯤 문제없다며 어 깨를 펴댄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인데 자만하지 말고 술 양을 줄 이고 주의하라 하지만 소용이 없다. 처음에는 한잔만 마실 것처럼 한잔을 따라 놓고는 술병마개를 닫 는다. 오늘은 술안주가 좋아서 더 마시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때 로는 안주가 남았으니까 한잔 더 해야 하고, 사위가 사다준 양주니 까 한잔 더, 울적하니까 한잔 더, 기분이 좋으니까 한잔 더, 외국에 있는 딸한테서 기쁜 소식이 왔으니까 한잔 더, 아트크라이밍(실내암 벽등반)에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겼으니까 한잔 더…, 핑계없는 날 이 없다. 결국 한잔만 한다던 반주는 소주 한병을 거뜬히 비운다. 병원의 내과의사가 나를 보고 심장기능이 저조하니까 저녁이면 적 포도주를 한잔씩 마시는게 좋겠다고 권한 적이 있다.

 

이마트에 가서 적포도주 한상자를 사왔다. 퇴근을 해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가 무 섭게 남편은 포도주병을 꺼내와서 “당신 약 먹어야지? 내가 따줄께, 약이니까 당신 먼저 마셔”하면서 잽싸게 술잔까지 가져다가 한잔 따 라주고는 느긋이 자기 잔에 따르면서 하는 말이 “포도주는 따면 다 마셔야 하는 법이지”하면서 한잔 주고는 나머지는 자기가 다 병을 비운다. 친구가 반가워서 한잔 하자던 것이 한잔이란 단어 말미에 “만” 자까지 부쳐가면서 끝난듯 하다가 한잔만 더 하고, 이렇게 마셔대다 보면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술을 마시고 결국 술이 사람을 쓰 러뜨린다. 솔직이 취해서 술주정을 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십오륙년전 시 모님이 치매로 7년째 고생을 하고 계셨을 때 파출부도 안오고 퇴근 해서 저녁해 먹고 치운 후 하루종일 쌓여진 시모님 빨래를 하다보면 자정을 넘겨야 할 때가 많았다. 몸은 녹초가 되었는데도 잠은 안오 고 몸을 뒤척이다 물을 마시러 나와 눈에 띄인 소주병…, 한잔만 마 시면 잠이 올 것 같았다. 한잔을 마셨지만 잠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잔 더, 두잔을 마셨는데도 잠은 오지 않고 팔다리는 맥이 빠져나가 흐느적거리고 일어설 수도 없다.

가슴은 콩튀듯 뛰어대고 있었지만 정신만은 더 말똥거렸다. 한잔만 더 마시면 가슴속에 응어 리가 주정을 통해서 다 풀려나갈 것만 같아 한잔을 더 비웠다. 왜 그랬을까. 정신이 더 또랑또랑해졌다. 잠을 청하기 위해 한잔 더 술 과 씨름을 하다니…, 한잔 더하면 모든 바램이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의도와는 반대로 위경련이 일어난양 위가 뒤틀어지고 구토가 나기 시작했다. 엉금엉금 기어 화장실에 가서 한시간이 넘도록 창자 에 쓴물까지 토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남편과 딸들도 체한줄 알고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이러한 한잔 더의 아름답지 못한 묻혔던 기억이 지금 나를 씁쓸하게 하고 있다. “한잔 더”하는 행동문화를 “한번 더”칭찬해 주고 “한번 더” 사랑해 주고“한번 더” 격려해 주는 문화로 바꾼다면 살맛나는 세상 이 되지 않을까 소망해 보고 싶다.

제 327호 (200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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