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떤 틀을 가지고 태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공직에 있을 동안 하지 못한 일을 뒤늦게나마 하는 것으로,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에 연루돼 공직생활을 마감한 이석희(64) 전 국세청 차장이 프로극단의 연극무대에서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고 있다.
5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극단 우투리의 '리회장 시해사건'은 국내 대표적인 연극축제인 서울연극제의 공식참가작으로,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날 보러와요'를 쓴 김광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의 신작이다.
재벌 총수의 죽음을 둘러싸고 장례식과 사망 1주일 전의 사건을 모자이크 식으로 보여주며 재벌중심 한국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이 작품에서 이씨는 주인공인 리회장 역으로 열연하고 있다.
그는 "출연 제의에 처음에는 사양했는데 대본을 읽어보고 타이틀롤이 욕심이 나서 무리하게 도전했다"고 말했다.
"평생 공직생활을 하다가 그만뒀는데, 자유분방한 성격인 내가 기업에 들어가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무대에서라도 그 경험을 해보게 된 거죠."
현재 건설회사와 세무법인회사를 경영 중인 그는 회사일 뿐만 아니라 아들의 결혼식 등 집안의 대소사까지 미루며 이번 연극에 몰두하고 있다.
"사실 굉장히 힘들어요. 사무실 일도 거의 못 봐 회사에도 미안하고, 집에도 미안합니다. 집사람에게 완전히 찍혔어요. 하지만 이제 나도 60대 중반인데 언제 이런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겠나라는 생각에 무리했죠."
프로 연극무대에 서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는 경기고와 서울 법대 연극반 출신으로 오랜 시간 연극과 인연을 맺어왔다.
1991년 경기고 연극반 출신이 모여 시작한 화동연우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꾸준히 무대에 서 왔다. 이번 작품을 쓰고 연출한 김광림 교수도 이 모임 회원으로, 평소 이씨의 이미지와 연기력을 지켜보고 출연을 요청했다.
김 교수는 "이번 공연에 뒤늦게 참여해 걱정도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고,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무대 위에서 나타난다"며 "60대 배우가 많지 않은 국내 연극계에서 수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벌써 다른 공연에서 그에 대한 출연 섭외가 오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