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安은 옛 都邑地답게 폭넓은 道路網이 一目瞭然하게 整備되어 疾走 하는 車輛들로 活氣가 넘쳐 났다. 氣溫은 大陸性 氣候影響으로 낮기온 이 38°C를 윗돌아 선뜻 적응키 어려워 활동하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웠 다. 西安은 當日觀光 스케줄로 아침일찍 출발한 관광버스는 끝이 보이지 않은 보리밭 평야를 가로질러 일차 목적지 勵山 華淸池에 도착했다. 華淸池는 天然溫泉水가 湧出하는 天惠의 休養地로 唐나라 玄宗이 別宮을 지어 天下一色 楊貴妃와 더불어 歡樂에 빠져 政事는 뒤로 제쳐둔 채 오직 貪淫에 얼룩진 浴湯施設들이 그때의 裸身을 그대로 들어내어 女體에 脆弱한 한 男性의 狂態를 연상할 수 있었다. 中國近代史의 象徵物로 華淸宮 5間廳의 유리창을 관통한 수개의 탄 흔이 당시의 상황을 잘 일러 주고 있었다.
世界 第2次大戰 종전 후 中國은 國共(國民黨, 共産黨)으로 양립, 內訌의 위기에 직면한 蔣介石 政府가 華淸宮 5間廳에 臨時政府를 두고 있는 동안 國共合作論의 결렬로 蔣介石 狙擊事件을 유인, 결국 5間廳은 西安事變의 發祥地로 歷史的 意義를 담은 곳이라 하여 現場保存이 잘 되어 있었다. 西安觀光의 하이라이트 秦始皇陵은 文獻에서 익힌바 現場踏査에 더욱 好奇心이 발동하였다. 陵의 높이 40m 陵域 사방 4km에 이른 封墳 위에 올라서니 외형상으로 보아 陵이라기 보다 큰 野山을 農耕地로 개간하여 한편으로는 農作物이 풍요를 이루고 封墳 中心部의 전체는 석류나무로 완전 뒤덮혀 때마침 석류꽃이 활짝 피어 그 일대를 붉게 물들여 놓았다. 封墳 전체를 석류과수원으로 조성한 동기는 文化財保護 측면에서 도굴 을 방지하고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석류과즙 생산량 제고를 도모하기 위한 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陵 地下宮殿은 秦始皇帝의 永生의 搖籃으로 宮闕 전체규모의 구도는 司馬遷의 史記와 現代考古學者들의 考古學史料를 토대로 종합분석하여 歷史館으로서 秦始皇時代를 再照明하고 있었다. 宮殿은 宇宙의 縮小版으로 천체의 星座 北斗七星을 가상하고 絶對權力者의 威嚴과 身柄保護를 위하여 宮闕外廓城을 重疊으로 쌓고 迷路를 통 한 出入門의 配置 등 그 이외에도 상상을 초월한 치밀한 構想 자체가 現代科學으로도 감히 엿볼 수 없는 暴力的 威力의 産物이라는 점에 경탄 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에는 秦나라의 永久不滅을 과신하는 文武百官들의 造型物들로 빼곡히 차 있었으나 어두컴컴한 실내 조명으로 사물 자체를 분간하기에 오히려 곤혹스럽게 느껴져 好奇心 期待値 만큼 미치지 못한 아쉬움만 남긴 채 돌아섰다.
더욱 황당한 것은 秦始皇의 미이라가 보존되어 있다는 점인데 本體發掘은 現代科學으로도 탐색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永久未濟로 남겨 두었다고 한다. 같은 陵域에 있는 兵馬俑坑은 1, 2, 3갱으로 되어 있는데 1, 2갱은 발 굴이 완료되어 진열된 兵馬俑이 상당수 훼손되어 있었으나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木鐵製 兵器는 부식되어 흔적도 볼 수 없었다. 3갱은 발굴이 진행중이었으나 進行度에 비추어 총 매장량 6,000여건 중 지금까지 1,083건이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잔여 발굴까지는 앞으로 수세기가 걸릴 것으로 추상하고 있다고 한다. 正午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아스팔트 광장은 마치 사우나탕에 들어선 듯하였다. 서둘러 長安城 섬서省 博物館 관람에 들어섰다.
館內 碑林은 碑石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 6동에 걸쳐 3,000여개의 碑石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宋나라 시대의 石鏡과 隨나라 시대의 觀音座像은 文化遺産으로 보존되고 碑石碑文은 중국역대 의 名筆들의 필치로, 특히 불멸의 명필 왕희지, 안진경, 미불 그리고 후 대 西太后 등이 쓴 碑文은 잠정적으로 拓本이 허용되어 商業主義的 發想 으로 귀중한 文化財가 크게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老婆心을 저버릴 수 없었다.
이 날 따라 博物館의 開館記念日이라서 밀려 든 觀光人波로 사람에 떠 밀려 走馬看山格으로 스쳐지나 아쉬움이 많았으나 한편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신라 말엽 孤雲 崔致遠 先生이 唐나라에 유학하여 이 곳에서 수학, 科擧에 급제하여 唐나라 政府에 중용되어 先生의 學風이 한 민족의 긍지를 드높이게 하는 그 裏面에는 客窓의 외로운 恨도 많았었다고 膾炙 되어 왔다. 孤雲先生은 오랜 세월 唐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향수에 젖어 고독에 몸부림칠 때면 自作詩를 읊어 望鄕의 恨을 달랬다고 한다. 秋風惟苦吟 世路小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西安觀光의 휘나래, 그리고 그 白眉는 당연 慈悲恩寺였다. 慈悲恩寺는 長安市內 한복판 드넓은 경내에 大雁塔을 배경으로 大雄殿 의 수려한 丹靑은 웅장함을 더해 法堂에 든 巡禮者들의 기원에 祝願讀經 이 낭랑히 울려 퍼져 가더라. 大雄塔은 大乘佛敎의 大法師 三丈法師가 印度 聖地巡禮를 마치고 돌아 가는 길에 많은 佛經을 가져와 7층 전탑을 세워 佛經을 奉安한 塔으로 의연하고 장엄한 塔身에 千年古色이 창연하여 벽돌 하나하나에 스쳐간 세월의 자국이 묻어나 있더라.
中國에서 마지막 晩餐으로 中國傳統 만두로 유명한 西太后 만두집으로 안내되었다. 소개된 바에 의하면 淸나라 西太后가 垂簾聽政 權座에 올라 寧日을 즐 기면서 만두를 별미로 太后가 즐겨 찾았다고 전해지면서 그 후부터 만두 가 대중인기 메뉴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만두정식은 각각 맛과 색, 모양이 다른 20가지 만두가 차례대로 연이어 나오는데 처음 먹어본 우리들로서는 주어진 양을 다 소화하기에는 무리수 였다. 만두의 元祖 中國땅에서 만두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었기에 무엇보다 대륙에서의 먹거리 추억으로 그 여운을 오랫동안 간직하리라 믿는다. 4박5일 중국대륙의 남과 북, 그리고 中原의 일부까지 두루 살펴 본 감 상인즉 氣候風土가 계절따라 순리대로 변하는 우리의 산, 우리의 강, 그 리고 우리의 국토가 제일이구나를 反芻하며 어느덧 下界를 내려보니 아름 다운 祖國의 山河가 한눈에 들더라.
제 305호 (2000.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