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경수
연합뉴스 기자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중 하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프랑스어로 ‘귀족성의 의무’를 뜻한다. 이 말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로마시대 초기 귀족의 불문율이기도 했다. 로마는 이 정신에 자극받은 왕과 귀족들의 활발한 병역참여와 희생, 기부문화 덕에 오랜 번영을 누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지금도 영국 황실 왕자의 군복무 전통, 카네기 등 미국 기업인들의 기부문화로 남아 사회통합에 기여하고 있다.
조선 정조 때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식량난이 가중되자 제주도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으로 쌀을 사서 나눠준 거상 김만덕이나 군수업으로 번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쓴 최재형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일각에서는 이 단어가 매우 계급 차별적이라고 지적한다. 출발부터가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없는 노예와 귀족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다원화되고 다양화된 사회에서 그 나눔의 정신은 지켜져야 할 윤리, 도덕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법인과 개인에 대한 판단 잣대로 삼는 일이 많아졌다. 그만큼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졌고 사회가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는 반증이다.
최근 언론을 타고 있는 금융권의 ‘탐욕론’도 출발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이 이익 극대화를 꾀하고 주주와 직원들에게 이익의 일부를 나누는 일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 사회는 ‘그들만의 성장, 그들만의 돈잔치’에 얄궂은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언론은 연일 은행들이 거둔 이익과 기부금?기여금을 비교하며 과거 아무런 시비거리도 아니었던 배당행위를 타박하고 있다. 10월초에는 대통령까지 나서 은행들이 사회공헌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까지 거들었다. 억울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어려울 때 나랏돈 받아 목숨을 부지한뒤 ‘노력’보다 앉아서 챙긴 예대마진으로 배를 불려온 은행권은 이 주장에 핑계거리가 궁박해 보인다.
잘 나가던 연예인 강호동씨 역시 마찬가지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건이 불거진 뒤 인터넷에 ‘엄청난 돈을 벌지만 누구와 달리 사회 기부활동에 인색하다’는 글이 올라오면서 그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감이 커졌다. ‘돈많은’ 그가 기부는커녕 세금까지 떼먹었다니 곱게 보일리 없었다. 공인(公人)이었으니 음으로야 사회공헌활동을 적잖이 펼쳤겠지만 모두 헛헛했다.
돌이켜 보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꺾인 것도 군 기피, 불법전입, 투기, 탈루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거리가 먼 주변 인물을 나라 동량(棟梁)으로 쓰려 했기 때문 아니겠는가.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은 얼마전 부자들의 세금을 올리자고 얘기했다. 이른바 ‘버핏세’를 도입하자는 건데 프랑스와 영국의 부자들이 동조 움직임을 보이고 미 뉴욕 맨하탄 한복판에서 월가의 점령시위가 이어지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버핏은 ‘부자들이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출발’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개인의 기부도 좋지만 나라 정책을 운영하는 국가기관의 세입이 많아야 효율적인 분배, 바람직한 국가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녹아있다.
맞는 말이다. 버핏의 철학대로 우리 사회도 더 이상 세금이 숨기고 피해야할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세금 덜 낸게 덕목이 될 수 없다. 돈이 많든 적든 성실한 납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작이요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금 아끼자고 허위 계약서를 쓰고 이리저리 주소를 옮겨다니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네’하고 불우이웃에게 기분쓰듯 ‘하사금‘(?) 던지는 행동은 좀 사라졌으면 한다. 매출전표 조작하고 현금수입 숨기면서 큰 돈 벌어 방송사, 신문사에 몇백만원, 몇천만원 기부하는 것도 본말이 전도된 사례다. 그런 돈 받는다고 기분 좋을 사람도 없고 사리에 맞지도 않다. 편법으로 고객들의 세금을 얼마 줄여준 걸 능력있는 세무사라고 치켜세울 일도 아니다.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했던 로마는 쓰러졌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제정(帝政) 이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해이해진 것을 원인으로 꼽는다. 기본이 흔들리면 모든 게 흔들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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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신문 제567호(2011-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