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가 기업들의 `합법적 탈세'에 규제의 칼을 뽑아들 태세다.
영국과 독일은 5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리고 있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이른바 `역외(域外) 탈세' 방지를 위한 국제 공조체제 구축을 제안해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기업들의 절세 또는 세금 탈루 방식이 `세계화'된 지는 오래 됐다. 인터넷 발달에 따른 전자상거래 등은 여기에 날개를 달아줬다.
그러나 기존 제도와 각국의 규제는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한계와 무력증을 극복하기 위해 주요국들이 이제라도 서둘러 국제 공조체제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 양국의 제안이다.
◇ `이전(移轉)가격조작, 가공 법인, 조세회피지역 = 기업들의 `절세' 또는 편법적 세금 탈루는 주로 이전가격조작을 통해 이뤄진다. 세율이 높은 나라의 법인에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각종 사업 비용을 떠넘기고 이익은 세율이 낮은 곳에 설립한 서류상 법인에 몰아 줘 세금을 줄이는 방법이다. 여기에 서류 상으로만 존재하는 가공의 법인, 세율이 매우 낮고 외국자금에 `묻지마 유치'를 하는 소위 조세회피지역(조세천국) 등이 동원된다.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섬나라들 뿐만 아니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스위스, 아일랜드 등도 자주 활용되는 국가다. 네덜란드의 경우 외국기업 법인으로 유입되는 이자와 로열티, 배당금 등에 매우 낮은 또는 무시해도 좋은 수준의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법인세가 12.5%에 불과해 특허료 등 지적 재산권 수입이 많은 기업들에 매력있는 곳이다. 기업들은 다단계의 내부 회계처리 과정에서 각종 비용 부풀리기나 이익 축소 등 불법과 편법을 동원한다.
◇ 세계화로 조세회피도 급증 = 지난달 영국에선 미국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 등의 세금 문제가 중요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14년 동안 30억 파운드의 매출을 낸 스타벅스 영국법인이 낸 세금은 그 1%도 안되는 860만 파운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됐다.
스타벅스는 특히 최근 3년 동안엔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투자자들에겐 영국 사업의 수익성이 좋다고 말해왔으나 세무당국엔 이익이 나지 않았다고 신고했다. 이 과정에서 주로 이전가격조작이 구사됐다.
스웨덴 가구 상점 체인인 이케아 역시 해외 자회사에 로열티 지급 방식으로 이익금을 보내 영국에서 법인세를 절반만 냈다.
이른바 남유럽 국가의 거대기업 가운데 60%가 조세회피를 위해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네덜란드에 지주회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네덜란드 경제지 피난시엘레 다그블라트는 보도한 바 있다.
이 신문은 네덜란드 주요 은행들이 조세회피지역에 서류상의 자회사들을 무더기로 설립, 운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난 4일 폭로했다. ABN암로의 경우 2008년에 8개 조세회피지역에 55개를 거느렸으며 ING는 2009년 71개에 달했다.
◇ 인터넷과 전자상거래로 규모 커지고 수법 정교화 = 전자상거래 확대와 인터넷 기업 발달로 역외 탈세 규모는 기하급수로 커지고 수법도 정교해졌다. 최근엔 단순히 물품 가격을 넘어 경영 노하우, 브랜드 가치, 특허, 소프트웨어 같은 지적 자산을 조세피난처로 옮겨놓고 비용처리를 해 세금을 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 기업인 애플이 2011회계연도에 미국 밖에서 거둔 수익은 368억 달러에 달한다. 반면에 이 회사가 낸 세금은 7억1천300만 달러다. 세율로 1.9%에 불과하다. 뉴욕 타임스는 "애플이 탈세 기법의 선구자"라면서 "정상적이라면 미국 정부에 24억 달러를 더 납세해야 했다"고 비난했다.
애플은 해외 수익을 세율이 낮은 아일랜드와 네덜란드 자회사들을 거쳐 '세금 천국'인 카리브 해역으로 돌려 세금을 줄이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네덜란드 샌드위치를 곁들인 아이리시 커피 더블' 기법으로 불린다.
프랑스 정부는 최근 구글의 프랑스 법인과 아일랜드 지주회사가 지난 4년간 이전가격을 조작한 혐의로 10억 유로(1조4000억 원)의 세금 추징을 통보했다. AFP통신은 "지난해 구글 프랑스 법인 매출은 12억5000만~14억 유로인데 겨우 500만 유로의 세금만 냈다"고 전했다.
미국에 본사를 둔 이베이는 영국에서 5천만 파운드의 세금을 내야 하지만 이익을 룩셈부르크와 스위스 등에 세운 서류 상의 법인으로 이전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이스북도 조세회피를 위해 네덜란드 등 여러 곳에 복잡한 구조의 해외 자회사를 만들어 놓고 있다. 네덜란드 일간지 `드 페르스'는 페이스북 암스테르담 법인 사무소를 찾아가 보니 텅텅 비어 있고 실제로 일하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합법 탈세의 창구임이 틀림 없다고 보도했다.
◇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 국세청은 지난 4월 삼성전자에 탈세 혐의로 4천700억 원대의 세금을 추징하겠다는 통보를 한 것으로 보도됐다. 세무조사 결과 국외 특수 관계 법인과의 이전 거래를 통한 가격 조작으로 탈세를 했다는 것이다. 국세청은 삼성 외에도 엘지, 현대자동차 등 일부 대기업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와 세무 전문가들은 사실 이런 거대기업 뿐만 아니라 해외에 사업장이 많은 다른 대기업이나 중견 기업들에서도 역외 탈세가 적지 않게 이뤄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게임업체 등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국내 기업들이 벨기에나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준 조세회피지역에 법인을 둔 것도 기업이나 사주 개인 재산과 관련된 이른바 `절세'와 무관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관세청은 지난 7월 이전가격 조작 등으로 관세나 내국세를 빼돌리는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국내에 진출한 5천여 개 다국적기업의 수입가격 동향을 상시 감시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 기업, 국제화 시대 합법적 절세라고 주장 = 각국 세무당국은 때때로 이전가격 조작 등에 대한 조사를 하고 추징금을 부과하고 있다. 이런 조치는 자발적으로도 이뤄지지만 시민단체 등의 지속적인 압박에 밀려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해당 기업들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불복하고 법원에 제소하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사업하며 이를 통합 관리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그 과정에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절세를 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국제화 시대에 맞지 않는 잣대를 들이댄다고 볼멘 소리도 한다.
사실 각국 당국이 적발, 세금을 추징하는 것은 대체로 이런 `합법적 절세'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또는 규정을 잘못 적용한 부분 정도에 그치고 있다. 린 호머 영국 국세청장은 의회 청문회에서 현재로선 다국적 거대기업들의 이 같은 행태를 막는 일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토로했다고 5일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전했다.
전문가들은 현행 법규에 그만큼 허점이 많고 정책과 세제가 세계화 추세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각국이 투자 유치를 위해 외국자본에 대해 경쟁적으로 관대한 정책을 펴는 것도 원인으로 분석된다. 당국의 세무회계와 기업회계의 기준의 격차가 크기 때문에 빚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이들은 설명한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와 정치권은 과세 당국의 의지가 약하다고 질타했다. 영국 노동당 오스틴 메칠 의원은 국세청이 힘에 부치는 대기업들 대신 자기 방어력이 약한 중소기업이나 개인에 대한 징세에 주로 집중해왔다고 주장했다. 영국 조세정의 관련 시민단체 회장은 "설령 기업들의 행위가 합법적일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며 악취가 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 국제 공조체제 실현될까? = 조지 오스번 영국 재무장관은 역외 탈세 단속 등은 오늘날처럼 세계화된 상황에서 어느 한 나라 단독으로 조처를 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주요 국가들이 단합해서 행동하는 것만이 특정 국가에 피해를 주지 않고 탈세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영국과 독일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구체적 실행 방안 연구를 의뢰했으며 내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릴 차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 보고서가 제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멕시코 G20 재무회의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조만간 국제적 공조체제를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국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 부분들이 있는데다 무엇보다 기업, 즉 거대자본들이 이에 거세게 저항해 실효성 있는 조치가 어려울 것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비관론자들은 단기성 외환거래에 부과하는 세금인 토빈세가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논의만 이뤄지고 실제 국제적으로 도입되지 못한 점 등을 사례로 들고 있다.
반면에 낙관론자들은 유권자의 힘으로 정부와 정치권에 압력을 가하고 소비자의 힘으로 기업에 압박을 가할 경우 적어도 일정 수준의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감시와 압박활동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