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물을 관찰할 때에 보통 선입견(先入見)을 갖고 판단하여 주장을 펴면서, 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인류학자 루쓰 베내딕트(Ruth Benedict)가 말하기를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순수한 눈으로 보지 않고 각자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견으로 편집하여 본다”고 일찍이 말한바 있다.
이는 동일한 사물을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고 말한다는 뜻일 것이다. 같은 달을 볼 때, 슬픈 마음(선입견)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슬픈 달이 되고, 기쁜 마음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기쁜 달이 된다.
철학자 칸트(E. kant)의 인식론이라든지 하는 철학에는 문외한인 필자 생각에는, 원래 사물을 인식한다는 자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준 즉, 선입견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만약 사람의 사유(思惟)에 아무런 기준이 없다면, 어떤 사물을 보아도 우리 머리 속에는 망망 대해에 어떤 물건이 둥실둥실 떠 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 아닌가? 금방 태어난 어린애는 아무런 선입견이 없어 사물을 알아볼 수 없고, 단지 사물이 눈에 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루쓰 베네딕트는 당연한 사물의 인식원리를 간파했을 뿐이다.
6월 중순 어느 일요일, 나는 좋아하는 산에 가지 않고 내자(內子)가 그 날 마침 몸이 불편하여 집에 있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시간을 같이 보낸다고 해도 극히 무미건조하고 단지 집에 있다는 의미밖에 없다.
아침밥을 먹고, 내자는 응접실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나는 안방에서 간단한 독서를 하다가 낮잠을 잤다. 한참을 자고 깨어보니, 몸은 더 피곤하고 정신은 더 맑지 않아 나는 집 마당 대문 앞에 등산용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방에서보다 훨씬 정신이 상쾌하고 몸은 경쾌하였다. 그래서 응접실에 있는 내자를 불러 밖으로 나오도록 했다.
내자도 응접실에 있을 때와 기분이 다른지, 대문 앞 돗자리에 누워 “게으른 부부 산에 소풍 왔다”고 즐거워한다. 정원은 없지만 대문 옆 소나무는 제법 6월 낯 햇볕을 가려준다. 나는 돗자리에 누워 소나무를 감상하면서, 아파트 생활을 원하는 내자에게 단독주택의 장점을 일깨워주었다.
만약 우리가 아파트에 살았다면, 게으른 내가 어떻게 안방 밖으로 나와 이런 상쾌한 바람을 맞이하겠는가? 하찮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내자가 부엌에 가서 빵과 우유 및 토마토를 쟁반에 들고 대문 앞 돗자리로 가지고 나왔다. 음식이 부엌 식당에서보다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내자 먹으면서 하는 소리 “우리들! 산에 소풍와서 밥 먹는다”는 것이다.
자기 집 대문 앞 소나무 밑에서 빵 조각 먹는 것이 어떻게 높은 산에 와서 밥 먹는 것이 되겠는가 마는, 내자의 선입견에는 산에 소나무가 있는 사실, 어릴 때 도시락 들고 소풍가서 밥 먹었던 기억들이 있어 그렇게 말했을 게다. 나도 내자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그렇다고 대꾸하였지만, 나중에 안방에 들어가서 휴지를 들고 나오는 순간, 대문 앞 돗자리에서 빵 조각 먹는 내자 모습이 시골 거지가 밥 얻어먹는 것으로 내 머리 속에 비치었다
내자가 자주 “자기 선친께서는 거지에게 밥을 줄 때 깔끔한 밥상을 차려주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입견에서 그렇게 비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흥을 돋우려고 내자에게 ‘우리가 지금 거지로 밥 얻어먹고 있다’고 말하면서 서로 박장대소하였다.
한참 웃고 난 후, 나는 새삼스레 사람들의 선입견을 실감해 본다. 확실히 모든 사람들은 같은 사실을 보고 각각 달리 말한다. 정치인이든 학자이든 또는 일반 시민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본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판단기준, 즉 선입견에 맞추어 보아 정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 판단기준에 맞춘 주장을 ‘맞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민주국가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문제는 자기 판단기준, 즉 선입견이 꼭 맞는 것인가를 숙고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주장의견만 맞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틀리다고 보아, 반대의 주장의견을 간과해 버리는 것이다. 형식 논리적으로 보아도 사람은 신이 아니고 모두가 평등하다고 할진데, 각자의 판단기준에 맞춘 의견은 상대방이 틀릴 수 있다면, 나도 틀릴 수 있고 또 내가 맞을 수 있다면, 상대방도 맞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 판단기준을 반성하지 않고 그 기준에 맞는 내 의견만 옳다고 고집할 것인가? 도리어 내 의견만 고집하는 것이 편협되고, 부족하고, 틀린 것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발견해 본다
만약에 우리 부부가 대문 앞 소나무 밑에서 빵 조각 먹는 사실을, ‘산에 소풍와서 밥 먹는 것’이라고 고집하였다든지 또는 ‘거지가 밥 얻어먹는 것’이라고 고집 부렸다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짓이 되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행정 및 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이런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을까?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과 같이 자기 선입견을 반성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는 자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인 것 같다. 선입견에 쌓인 나에게 “사람은 하루에 세 번 반성하라”는 성현의 말씀이 조금 터득되는 듯 싶다 .
제 346호 (2002. 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