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홍 규 세무사
흔히들 우리 인간을 ‘이성’을 가진 동물로서 정의한다. 이성이란 사물을 옳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진위), 선한과 악함(선악), 아름다움과 추함(미추)을 식별하는 능력으로 일반적으로 감각능력외의 사유능력을 말한다. 인간이성의 위대함은 과학적 인식적 차원에서 여전히 앞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임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인식하는 인간이성의 기제는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은 과학적 인식의 등정상 들머리에 해당하며, 이를 해명하는 작업은 인식의 절차상 당연하고 또한 인간이 인간을 해명하고 탐구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알게 되는 것을 ‘인식’이라 하고 사유한다는 점에서 인식과 이성은 본질적으로 동질성을 가지며 이는 철학에서 특히 존재론과 더불어 인식론의 한분야로 중요하게 자리매김한다.
서양의 근대인식론은 유럽대륙의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으로 이어지는 인간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합리주의가 태동하였다. 이는 비합리적?우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논리적?필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이성적 태도로서의 과학방법이다. 다음으로 영국을 중심으로 한 베이컨, 로크, 흄 등으로 모든 지식의 기원을 경험에 두고 관찰 또는 실험 등에 의한 경험적 인식을 절대시하는 경험주의가 태동하였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각자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이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모두를 도입하여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경험이라 하면서 이를 ‘직관’으로 설명하고, 머릿속에 들어온 경험사실 즉 직관을 양, 질, 관계, 양태의 12가지 범주를 상호 연결하여 개념을 형성하고 판단한다 하면서 이를‘지성’(오성)이라 하였다.
이때 우리인간이 합리 또는 경험과는 별도로 선천적으로 가지는 본능 즉, 선험적인 틀이 있다고 하고 직관에서 시간과 공간의 틀이 그러하고, 지성에서는 12가지 범주가 선험적이라 하며 순수이성이란 용어도 경험과 무관한 선험적인 기의로 기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인식이라 함은 사물이 그러함을 경험하고 난 후 12가지 개념범주의 선험적인 틀로서 비로소 인식한다 하였다. 그럼에도 사물자체가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고 인식하는 주체자의 잣대라는 것이다. 이점에서 칸트 스스로 ‘코페루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하였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며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라는 말로 이제 인식론은 경험주의 보다 더 합리주의에 가까운 ‘칸트의 인식론’으로 자리잡는다.
한편, 인간이성의 공간적 활동위치는 신경과학적으로 ‘뇌’이다. 뇌에서 인식하는 것은 이성뿐일까? 또한 이성은 어디서부터 나왔을까. 이점에서 가스통 바슐라르(프랑스)는 상상력과 이미지까지도‘몽상의 물리학’이라는 분과로 그 인식적 지평을 넓혀 그 분야의 코페루니쿠스로 불리운다. 인식론의 저편에서 비합리성. 우연성 등으로 분류되는 상상력과 이미지는 합리성과 반대되는 오류적 대상으로 간주하여 왔다. 과학철학을 연구하면서 객관적 인식이라는 문제에 천착한 바슐라르는 오히려 이성의 방해물로 여긴 주관적인 상상력과 이미지로 이루어진 감성의 세계 내지 상상계야말로 인간행동양식의 원동력이며 창조의 못이라는 새로운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미지와 상상력은 엄격한 이성의 지배하에 있는 의식의 억압 아래서도 항상 미래를 향해 뻗어나간다. 이는 인간정신활동에 있어 오류가 아니고 주관적 가치체계이고 중요한 요소이며(홍명희) 창조의 세계이다.
이제 인간의 인식적 뇌는 프로이트의 의식과 무의식의 심연속에서 이성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의 인식적 지평이 하나의 못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이성의 세계보다 상상력의 세계가 훨씬 깊고 크다는 사실을 바슐라르를 통해서 알게 된다.
인식이란 깊고 넓은 무의식의 바다에서 항상 꿈틀거리며 생동하는 상상계를 거쳐 의식의 세계로 나가서 유동적인 상상력과 이미지 그리고 논리적이며 선험적 지성을 버무려 낸다고 한다면 인간인식의 지평은 지금보다 훨씬 깊고 넓지 아니한가?
세무사신문 제593호(201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