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재정적자를 해결하려면 고소득층 세금을 올려 세수(稅收)를 늘려야 한다" "아니다. 경제성장을 촉진하려면 고소득층 세금을 낮춰 투자 의욕을 북돋워야 한다"
교착상태에 빠진 미국의 재정절벽(fiscal cliff) 협상도 따지고 보면 뒤에는 이런 논리 싸움이 있다.
오는 31일까지 민주당을 대표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을 대표하는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연방적자 감축 세부안에 합의하지 못하면 미국은 내년 1월 1일부터 각종 세금이 오르고 정부지출이 대폭 삭감되면서 투자ㆍ소비 위축으로 경기가 급강하하는 재정 절벽(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하는 것은 부부 합산 연소득 25만달러(개인 20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소득 상위 2% 이내의 부유층)에 대한 소득세율 인상을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오바마와 베이너는 재정적자 감축과 균형예산 달성이라는 목표에는 동의하면서도 방법론에선 신규 세수 증대를 위한 부유층 증세(오바마)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부유층 감세(베이너)로 맞서 있다. 25만달러 미만의 중산층 이하에 대한 감세 조치는 양측 모두 찬성하고 있다.
민주당이 장악한 상원은 지난 7월 소득 상위 2% 이내의 고소득자에 대한 감세 조치 시한을 올 연말로 종료하는 `중산층 감세 법안'을 통과시킨 반면 공화당이 다수당인 하원은 지난 8월 부유층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감세 시한을 내년까지 1년 더 연장하는 `일자리 보호ㆍ경기침체 방지 법안'을 의결했다.
민주당은 하원(공화당)에 상원 통과안을, 공화당은 상원(민주당)에 하원 통과안을 처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또 부자 증세(일명 버핏세ㆍBuffett rule)를 이행하기 위한 `공평 분배 법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 의회의 초당적 조사연구기관(싱크탱크)인 의회조사국(CRS)이 부유층 감세가 경기를 부양하는 것도 아니고 부유층 증세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지난 13일 공개해 정ㆍ재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CRS는 입법ㆍ정책과 관련된 사항을 조사ㆍ연구해 그 결과를 의원과 상ㆍ하원 위원회에 제공한다. 특히 변호사, 경제학자, 사회ㆍ생물ㆍ물리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 600여명이 만드는 CRS 보고서는 의회의 정책이나 법안에 직ㆍ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 2007년 11월 CRS를 벤치마킹해 국회입법조사처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1945∼2010년까지 지난 65년간 부유층 세금 증감이 경제에 미친 영향을 정밀 분석한 것으로, 지난 11ㆍ6 대통령 선거 전에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반대로 연기돼오다 이날 빛을 보게 됐다.
이 보고서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내내 최고 소득세율은 90% 이상이었으나 지금은 35%로 낮아졌다. 최고 자본이득세율도 1950년대와 1960년대 25%, 1970년대엔 35%였으나 현재는 15%에 불과하다. 둘(35%와 15%)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최고 소득ㆍ자본이득 세율로는 가장 낮다.
1950년대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연평균 4.2%, 1인당 실질 GDP 성장률은 연평균 2.4%였지만 2000년대에는 각각 1.7%와 1% 미만이었다.
이런 수치는 지난 65년간 고소득층 감세로 경제가 성장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저축ㆍ투자 증대나 생산성 향상과도 거의 관련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공급 중시(supply-side) 경제학은 통상 정부가 감세하면 저축 증가→이자율 하락→투자ㆍ노동 의욕 증대→생산력 향상→물가 안정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해왔다.
반대로 부유층의 최고 소득세율을 2001년 이전 수준(현행 35%→39.6%)으로 인상하면 2013년 세수는 490억달러 늘지만, 이는 2013년 예상 GDP의 0.3%밖에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소수인 고소득자의 세율 변화(증감)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정도(negligible)'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보고서는 오히려 부유층 감세가 소득분포 최상위층에 있는 사람의 소득(수입) 집중을 심화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미 전체 가구의 0.1%에 해당하는 최상위 부유층의 소득 비중은 1945년 4.2%에서 2007년 12.3%로 높아졌다가 경기 침체기인 2007∼2009년 9.2%로 떨어졌으나 2010년부터 다시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 소득분포 상위 0.1%에 속하는 사람들이 낸 평균 세율은 1945년 50%에서 2009년 25%로 낮아졌다.
보고서는 세금정책이 경제 파이(pieㆍ규모)의 분배 방법과 연관될 수 있다면서 부유층 감세가 소득격차 확대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한편 CRS 보고서가 공개되자 민주당은 공화당의 부자 증세 반대가 근거 없는 것으로 몰아붙였고 공화당은 분석 방법에 문제가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고 시사주간지 내셔널저널 등이 전했다.
크리스 밴 홀런 하원 예산위원회 민주당 간사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에는 세금 인상에도 경제가 호황이었지만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엔 세금 인하 후 경제가 나빠졌다면서 "부유층 세율이 조금만 인상돼도 경제성장을 해칠 것이라는 공화당의 허구적 주장 한복판에 말뚝을 박은 매우 중요한 보고서"라고 말했다.
오린 해치 상원 재무위원회 공화당 간사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CRS 보고서가 `부시 세금'이나 `부자 감세'와 같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내용이 편향됐으며 실무 차원의 단순한 보고서를 민주당이 정치적 논쟁거리로 변질시켰다면서 "존 F 케네디 시절 이전의 세율인 91%(소득세)와 52%(법인세)로 돌아가도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