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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2693]
[국세청기자실] 원죄(原罪)와 음모론

이은우 동아일보 경제부 차장

 

2003년 충남 금산군 제원면의 한 폐교에서 미래산업 정문술 전 회장을 만났다. 그는 당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한국벤처농업대학 학장을 맡고 있었다. 폐교에 문을 연 이 학교의 첫 졸업식 자리에서 정 전 회장을 인터뷰하게 됐다.


인상 깊었던 대목 하나. 그는 집에서 생수 대신 수돗물을 마신다고 했다. 정 전 회장이 밝힌 이유는 ‘우리 사회가 모든 걸 음모(陰謀)로 보는 게 싫어서’였다.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종목을 추천하면 ‘저 애널리스트가 미리 사놓은 종목을 추천해 주가를 띄우려는 것이겠지’라고 의심하고, 검사가 무혐의로 처리하면 ‘저 검사가 돈을 먹었을 거야’라고 색안경을 끼고 본다. 서울시장이 나와 수돗물이 안전하다고 하면 ‘시장 본인은 집에서 고급 생수를 사먹겠지’라며 모든 걸 삐딱하게 본다.”


무척 공감이 가는 얘기였다. 많은 분야에서 뭔가 숨겨진 게 있고, 속이고 있다는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었다.  

 
이런 분야로 국세청을 빼놓을 수 없다. 국세청이 아무리 정기 세무조사라고 밝혀도, 그것이 사실이어도 현실에선 별 소용이 없다. 뭔가 배경이 있을 거야, 청와대 지시로 이뤄진 조사라며?, 해당 기업주가 정치권 파워게임의 희생양이라던데…. 이런 여론이 일면 객관적인 사실관계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정문술 전 회장과 비슷한 생각을 하던 본인은 그를 인터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세청을 출입하게 됐다.

 
몇 달 출입하다보니 ‘국세청은 정치권이나 윗선 눈치만 보는, 부패한 조직이다’는 생각을 하는 게 기자로선 편하다는 걸 알게 됐다. 삐딱하게 보고 음모론으로 접근하고, 그런 생각을 기사에 담으면 최소한 ‘물’은 먹지 않는다는 얘기다.


회사 선배들에게 “이번 조사는 정기세무조사라는데요”라고 했다간 취재력이 부족하거나 모자란 기자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다. 뭔가 그럴듯한 음모나 배후세력, 파워게임 등을 얘기해야 취재 잘하는 기자로 대우받는 경향이 있었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선배들의 얘기가 맞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꽤 괜찮은 관료라고 판단했던 청장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의 판단 오류를 심각하게 돌아보기도 했다.
인터넷 사용이 늘면서 모든 걸 비뚤게 보고, 흘겨보는 현상은 더 심해졌다. 그 대상이 국세청이나 검찰 같은 권력기관일 땐 더욱 그렇다.


국세청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다. 국민에게 서비스하는 기관이라고 자임하며 오랫동안 변신해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실제 일선 세무서를 방문해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위압적이던 과거와는 달리 친절하고 행정 처리도 빠르다.


‘빽’을 내세우거나 윗선에 줄을 대 세무조사를 무마하기도 어려워졌다. 뇌물을 받는 일도 많이 줄었을 게다. 그래도 국세청이 억울하다고 말하긴 겸연쩍을 것 같다. 원죄(原罪) 때문이다.

 
전목일구(田目日口, 한자에 포함된 네모의 개수만큼 4단계로 상납할 뇌물부터 혼자서 챙길 뇌물까지 종류가 있다는 뜻)라는 얘기가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청장들이 잇따라 법의 심판을 받던 게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이 때문에 국세청이 아무리 깨끗하고 친절한 봉사기관으로 거듭나도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은 삐딱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국세청의 원죄들을 잊어주기에는 과거의 나쁜 기억들이 너무 생생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을 ‘인식과 현실의 부조화’라고 표현하고 싶다. 국세청의 현실은 꽤나 모범적으로 개선됐지만, 국민의 인식은 불과 얼마 전 부정부패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분야의 음모론적 시각도 마찬가지다. 20여 년 전 ‘탁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박종철씨 고문치사 은폐 사건이 여전히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발표들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쉽지 않다.


이런 현상을 굳이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뒤집어보면 그 만큼 한국이 빨리 발전하고 성장했다는 반증인 까닭이다. 머릿속 나쁜 기억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투명해졌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개선할 부분이야 많겠지만.


힘 있는 기관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채찍질은 우리 사회의 발전 동력이었다. 그러나 과도한 의심과 근거 없는 음모론은 사회적 낭비를 초래하고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 인터넷 공간을 꽉 채운 의심과 유언비어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요즘 국세청이 역외탈세 추적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역외탈세는 ‘지하경제의 세계화’ 시대를 맞아 마땅히 막아야할 분야다. 이를 위해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자료 공유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가 만만치 않다.


가장 큰 이유는 ‘국세청을 못 믿겠다’는 거다. 국세청이 개인과 기업의 금융정보를 갖게 되면 다른 의도로 이용할지 모른다는 의심이 적지 않다. 이런 의심이 ‘인식과 현실의 부조화’에 따른 과도한 수준인지, 현실적으로 국세청에 대한 마땅한 견제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 사회가 꽤나 투명해졌고, 지나친 의심과 음모론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고 판단한다면 너무 순진한 걸까. 


정문술 전 회장처럼 수돗물을 먹지는 않더라도 한번쯤은 세무당국의 얘기를 있는 그대로 믿어보고 싶다. 믿게 만드는 건 그들의 몫이겠지만.

 

※위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무사신문 제594호(201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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