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에 지구 상의 막대한 검은돈이 몰려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세 피난을 원하는 이들에게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자리하고 있다.
7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따르면 전 세계 부자들이 BVI와 남태평양의 쿡제도 등 조세피난처에 재산을 은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른바 '역외 서비스' 업체 수십 곳이 은밀히 성업중이다.
이들 업체의 '속살'을 엿볼 수 있게된 것은 ICIJ가 분석한 BVI의 방대한 내부 자료 때문이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아시아에서 업계 최대 규모를 앞세우는 '포트컬리스 트러스트넷'(트러스트넷)이다.
이 회사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세계 16개 지역에 지사를 두고 있다. 소속 변호사와 회계사들이 전세계 140개국을 상대한다.
이들 회사가 상대하는 '고객' 약 7만7천명 가운데 4만5천명 가량이 중국, 대만, 싱가포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출신이다.
사람들이 트러스트넷에 돈을 내는 이유는 한 가지다. 비밀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서류상 업체와 신탁회사를 거미줄처럼 얽어 실소유주를 감추고, 차명으로 국외계좌를 개설하게 해 주는 등 이들의 비밀 유지 방법은 다양하다.
BVI에서는 특히 계좌 개설 목적으로 회사를 손쉽게 사들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른바 "간편구매 회사"다. 심지어 회사 내부 자료에서까지 '고객 A' '고객 B' '고객 C' 등 익명 처리를 해 주는 경우도 있다.
트러스트넷의 이런 "극진한 서비스를 애용하는" 계층 중에는 아시아의 독재자 가족들이 눈에 띈다. 1996∼1997년에는 미얀마의 장기 군사독재자 네윈의 사위를 위해 BVI에 회사 두 곳을 설립했다.
1998년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 퇴진 이후 수하르토 가족들이 이 회사 고객으로 왕왕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ICIJ 자료에서 드러났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범법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기업에서 빼낸 내부정보를 주식투자에 활용해 막대한 차익을 낸 혐의로 2011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미국 헤지펀드 갤리언의 설립자 라지 라자라트남도 이곳을 통해 신탁회사를 설립했다.
트러스트넷 고객 가운데 현재 사기나 돈세탁 등 각종 경제범죄로 민·형사 소송절차가 진행 중인 미국인은 30명이 넘는다.
관료들과의 유착도 밝혀졌다.
ICIJ 자료에 따르면 2003∼2010년 쿡제도 금융감독위원회(FSC) 위원장으로 재직한 트레버 클라크도 사모아와 BVI에 트러스트넷의 중개로 개인 역외기업과 신탁회사를 설립, 유지했다. 이들 업체는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자산의 보관처였다.
스위스의 UBS와 크레디트스위스 자회사 클라리덴, 독일의 도이체방크 등 세계 유수 은행들이 BVI를 통해 서류상 기업을 만드는 과정을 도왔다는 사실도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딜로이트·KPMG·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등 회계법인들의 이름도 거론된다.
ICIJ는 또 별도의 기사에서 BNP 파리바와 크레디 아그리콜 등 프랑스 대형 은행 두 곳도 탈세 지원에 가담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은행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말까지 BVI, 사모아, 싱가포르 등지에 탈세를 목적으로 한 수상한 역외기업이 대거 설립되는 과정을 관리했다는 것이다. 포트컬리스 트러스트넷도 이 과정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ICIJ는 BNP 파리바가 영국령 저지섬과 싱가포르, 홍콩, 대만, BVI, 사모아, 세이셸 등에 자리한 자회사를 통해 설립을 지원한 업체 56곳을 밝혀냈다.
크레디 아그리콜도 홍콩과 싱가포르 지사 등을 통해 36개 업체를 설립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의혹에 대해 BNP 파리바는 자사의 고객들이 상속세를 회피하려는 의도는 아니라며 "프라이빗뱅킹의 수용 가능한 한 형태일 뿐"이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