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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866]
서열·경쟁이 낳은 '한국적 甲乙문화' 고리 끊자
[2015-10-22 연합뉴스]
전문가들 "수직적 관계중심 사회의 폐단…지나친 '존중 욕구'"
기업은 수익에 목매 직원 피해 외면…"법적 보호장치 마련해야"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갑질'이라는 말에는 '문화'라는 단어가 따라붙었다. 갑질이 몇몇 개인의 일탈을 넘어 한국인에게 내면화한 의식의 발로라는 시각이 반영된 표현으로 풀이된다.

갑질은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서비스 산업에서 자주 발견된다.

서비스 산업은 한국뿐 아니라 여러 사회에서 발달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고객의 갑질이 외국과 비교해 한층 심각한 양상을 띤다는 데 주목한다.

위계와 서열을 중시하는 문화, 경쟁이 치열한 사회적 분위기 등이 서비스 산업의 비대화라는 경제 구조의 변화와 맞물렸고, 이 과정에서 고객을 중시하는 서비스업 정신이 특이한 방향으로 전개됐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 서열문화와 경쟁이 낳은 '한국적 甲乙문화'…'먹이사슬'로 악순환
산업구조가 발달할수록 전체 경제에서 서비스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것은 일반적 추세다. 한국의 경우 1953년 총부가가치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의 40.3%였던 서비스업 비중은 2013년 59.1%까지 커졌다.

서비스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고객은 더욱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받게 되고 요구하는 것도 많아지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갑질 현상은 유독 두드러진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서비스라는 용역을 매개로 한 거래 관계를 넘어, 고객이 종업원을 종처럼 여기는 등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장에서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필요에 따라 대등한 조건에서 거래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여러 상황에서 갑을 관계와 같은 비대칭성이 발견된다는 점이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외국에서는 자신의 신분이 높거나 특권이 있어도 생활 속 절차에 녹여서 이를 향유하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특혜를 받고 싶어하는 경향이 커 갑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한국적 갑을문화'로 부를 만한 이런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위계와 서열을 중요시하는 수직적 문화와 경쟁 위주의 사회 분위기를 꼽는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은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고, 존댓말 문화가 있어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도 갑이 되는 수직적 관계 중심 사회"라며 "'내가 너보다 위에 있으니 존중받겠다'는 욕구가 지나치다"고 말했다.

이병훈 교수는 "대학입시를 비롯해 모든 것이 경쟁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더불어 사는 가치를 중요시하기보다 남을 딛고 올라가 승자가 되려 하고 남을 무시하고 살아도 된다는 인식이 사회화된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상황에 따라 누구나 갑이 될 수도, 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에서 고객의 온갖 요구를 들어주느라 감정노동에 시달린 종업원이 소비자로 다른 매장 종업원을 대할 때는 갑의 위치가 된다.

이처럼 을의 처지에서 피해를 봤다가 자신이 갑의 처지에 서는 상황이 오면 그 피해를 또 다른 을에게 되돌려주는 '먹이사슬'이 형성된다는 분석도 있다.

이웅혁 교수는 "마치 다단계 구조처럼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갑과 을의 지위가 병존한다"며 "그러다 보니 을에서 갑으로 지위가 바뀌는 상황이 오면 최대한 갑의 대우를 받으려는 마음이 모든 계층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 '고객은 왕'이라며 종업원 피해 외면하는 기업
서비스업계 종업원들이 갑질 고객에 법적 대응에 나서는 등 권리를 찾아 나서는 움직임이 최근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고객의 부당한 요구로 피해를 보더라도 속으로만 삭이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기업의 태도를 지적한다. '고객은 왕'이라는 기조 아래 수익 내기에만 몰두하면서 종업원 보호에는 소홀하다는 것이다.

이성종 감정노동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일반 유통매장에서는 고객이 갑질을 해도 관리자들이 피해자인 종업원을 돕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고 사과하라는 식이어서 종업원들의 정신적 피해가 더 크다"고 말했다.

업종 특성상 고객의 부당한 요구를 일상적으로 받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수용 가능한 수준을 내부적으로 정하고, 이를 넘어서는 상황이 발생하면 종업원을 보호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박상현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매일 속이 타들어가는 직원들에게 무작정 친절을 강요하다가는 우수 인력이 회사를 떠나는 등 경영에도 나쁜 결과가 생길 것"이라며 "기업 자체적으로 직원 보호대책을 마련해 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고객이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성희롱, 폭언 등을 가하면 종업원이 자리를 뜰 권한을 주는 것이 한 방법이다. 고객의 태도를 어느 선까지 수용할지, 어떤 경우에는 법적 조치 등으로 강하게 대응할지에 대한 기준을 세울 수도 있다.

이성종 집행위원장은 "갑질을 일삼는 악성 고객에게 강하게 대응해야 함에도 기업 이미지 때문에 돈이나 물건으로 보상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며 "결국 기업이 악성 고객을 양산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 국회도 나서야…감정노동자 보호법안 발의
갑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대책은 입법이다.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적 주체로 여기는 의식 개선이 궁극적 해법이지만, 법적 제재라는 물리적 강제력을 둠으로써 갑질 심리를 억제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건을 통해 갑질과 감정노동 문제가 사회 현안으로 떠오르자 국회에서도 이를 더는 내버려둘 수 없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식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 6건을 비롯해 국회에 발의된 관련 법안은 10건이 넘는다.

김기식 의원은 올 7월 여신전문금융업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보험업법·근로기준법·은행업법·상호저축은행법 등 감정노동과 관련이 있는 6개 법안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각 개정안은 사업장에서 고객 응대 업무를 하는 직원이 고객으로부터 폭언이나 성희롱, 폭행 등 피해를 봤을 때 보호 조치를 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뼈대로 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사업주는 악성 고객에게서 피해를 본 직원이 요청할 경우 해당 고객으로부터 분리하고 업무 담당자를 바꾸며, 피해를 본 직원에 대한 치료와 상담을 지원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민·형사상 조치도 해야 한다.

직원이 피해를 봤는데도 규정된 조치를 하지 않았거나, 직원이 조치를 요청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준 사업주에게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는 등 강제성을 담보할 조항도 있다.

김 의원실 관계자는 "여야를 막론하고 특별히 반대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는 의원이나 집단이 없는 것을 보면 감정노동 문제에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며 "가시적 성과가 분명히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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