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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2014]
[기고] 주거보증금이 만들어 낸 목돈사회

정우성 변리사
(특허사무소 임앤정)


세무사 신문에 실릴 원고를 청탁 받고 어떤 내용의 글을 써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일단 세무에 관한 지식이 보잘것없어서 글을 내밀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변호사와의 직역분쟁에 관한 글을 떠올려 볼 수는 있었습니다. 이는 세무사회와 변리사회의 공통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관심사는 ‘외세’에 맞서는 일보다 ‘내부 혁신’이며, 온통 어떻게 하면 서비스를 강화하고 혁신할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까닭에 관심을 위장해서 글을 쓸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제 전문 영역에 대해서 글을 쓰기도 어렵습니다. 변리사 신문에 기고할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은 이렇듯 어려워서 원고 청탁을 거절했어야 하지 않았나 후회합니다. 그렇지만 부탁을 거절하는 일은 글쓰기보다 어렵습니다.

 

겨울 찬 바람이 불기 전에 졸저 <목돈사회>가 출간됩니다. 거기에서 저는 ‘주거보증금의 문제’를 공격적으로 다룹니다. 금전소비대차의 관점에서 보면 주거보증금은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돈을 빌려준 것입니다.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돈을 꾼 것이며 사적금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임대인은 집주인이고 권세가 있습니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임차인은 눈치를 보게 되며 대략 약자인 셈이죠. 말하자면 주거보증금은 약자가 강자에게 빌려준 돈입니다. 이는 매우 기이합니다. 보통은 강자가 약자에게 돈을 빌려주지요. 물론 약자에게도 혜택이 있습니다. 전세의 경우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반전세의 경우 월세가 줄어들지요. 그런 혜택은 은행에서 돈을 융통했을 때보다 이율이 좋습니다.

 

여기까지는 다 아는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으로 좀 더 들어가보겠습니다. 일단 주거보증금의 규모가 보입니다. 푼돈이 아니라 목돈입니다. 서울의 ‘평균’ 전세보증금은 2억 원이 넘습니다. 그러나 소득과 지출을 고려하면 연간 저축할 수 있는 돈이 천만 원을 넘지 못하는 가구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억대의 현금을 스스로 마련하는 일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돈 마련보다는 자기 능력에 맞는 집을 구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좋은 위치에 그럴싸하면서도 보증금이 없는 임대매물은 거의 없습니다. 은행 모기지론으로 아예 집을 장만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뜻하지 않은 장애가 있습니다. LTV(담보인정비율) 규제가 있습니다. 30%의 현금은 쥐고 있어야만 모기지론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보증금을 마련하든 대출로 집을 사든 어쨌거나 목돈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실 속으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새롭게 집을 찾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젊은 사람들입니다. 젊은 세대의 소득 수준에서 그들 개인의 능력으로는 목돈을 장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집을 찾아야 합니다. 주거지가 없는 경제적 독립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혼해서 분가를 하든 자립하기 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목돈마련은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입니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자립이 어렵습니다.

 

세무사들이 잘 아는 이야기를 감히 하겠습니다. 한국사회는 선진 외국보다 국민 개인의 조세부담이 적습니다. 한국은 한번도 OECD 국가 평균보다 조세부담률이 높은 적이 없었습니다. 개인이 부담하는 국세, 지방세, 사회보장기여금(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업재해보상보험, 건강보험 등)을 합쳐서 경상 GDP에서 차지하는 국민부담률을 GDP 대비 총조세부담률로 산출해 볼 수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2012년 국민부담률은 26.8%입니다. 2011년 OECD 평균 국민부담률은 34.1%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는 ‘증세여력’이 충분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적어도 개인과 가계의 관점에서는 증세여력이 별로 없습니다.

 

주거보증금이라는 목돈은 조세가 아니며 국가가 관리하는 사회보장기여금도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통계에는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목돈마련은 한국인의 필연적인 의무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과세를 구성합니다.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존재에 대한 대가, 그것이 바로 주거보증금의 사회적 의미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주거보증금은 좀처럼 피할 수 없습니다.

 

주거보증금 제도로 말미암아 매월 지불해야 할 임대료의 크기가 줄어드는 효과를 예찬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것이 한국 특유의 계산기 두드리기 합리성입니다. 돈의 크기가 다릅니다. 피할 수 없는 주거보증금의 크기는 개인의 소득능력을 초월합니다. 몇 년간의 소득을 소비하지 않고 전부 모아도 주거보증금을 마련하기 힘듭니다. 그것이 한국인의 필연적인 고통이며, 누군가(가족 혹은 은행)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과세입니다.

 

국가는 조세정의에 입각하여 국민에게 과세합니다. 소득의 크기와 보유하고 있는 재산에 따라 과세를 달리합니다. 빈곤한 사람에는 더 적게, 부유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과세를 합니다. 그러나 주거보증금 제도는 그런 정의를 모릅니다. 단지 위치와 크기에 따라 액수의 차이를 둘 뿐이지만, 그 차이를 막론하고 소득을 초월한 과세를 하는 셈입니다. 주거보증금 제도 자체가 사회정의를 핍박합니다.

 

이런 현실을 종합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주거보증금제도가 국가의 조세제도를 왜곡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첫째 조세부담과 사회적 과세 부담을 동시에 짊어지는 한국인에게 증세의 여력을 없애기 때문이며, 둘째 소득중심의 조세제도를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주거보증금 제도는 소득중심의 조세제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며, 셋째 국가의 조세정책은 징수되는 세금의 액수가 커지는 만큼 공공복지의 인프라의 개선을 도모하고 그것이 종국에는 개인의 행복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주거보증금은 그런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성을 띠기 때문입니다. 주거보증금은 조세보다 훨씬 큰 부담을 국민 각자가 서로 부과하면서 개인의 행복을 축소하고 공공복리를 스스로 해칩니다. 게다가 임대인은 과세를 싫어합니다.

 

복지사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증세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하지만 주거보증금 제도가 사회적 과세로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적어도 개인과 가계의 입장에서는 증세의 여력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지국가를 말하는 지식인이나 정치인이라면 주거보증금 제도의 철폐를 주장할 만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런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개인에게 목돈을 요구하는 사회, 특히 경제적 자립을 하려는 젊은이에게 목돈을 요구하는 사회는 한국을 제외하고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어째서 ‘헬조선’이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자립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지출의 문제입니다. 모든 지출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주거보증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위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무사신문 제664호(2015.11.16.)

 [조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