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주 기자
(서울신문 문화부)
‘응답했다, 1988!’
2015년 세밑, 대한민국이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에 뜨겁게 응답하고 있다. 유명 배우가 등장하지도 않고 스케일이 크거나 화려한 대작도 아니지만 소박하고 촌스러운 드라마 한편이 몸과 마음이 지친 한국인들을 따뜻한 감성의 힘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 그 시대를 지나온 40~50대는 물론 10~20대 등 전 연령대를 자기장처럼 끌어들이며 ‘응답’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5일 방송된 10회 ‘메모리’의 평균 시청률(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은 13.9%로 자체 최고를 기록했고 순간 시청률이 14.8%까지 치솟았다. 이후에도 꾸준히 13%대를 유지하며 시청률 한자리수대로 추락한 지상파 미니시리를 일찌감치 추월했다.
‘응팔’은 ‘응답하라 1994’ 마지막화가 기록한 평균 시청률 11.9%(순간 최고 14.3%)를 넘어서 역대 ‘응답하라’ 시리즈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재방송 시청률도 최고 4%까지 올랐다. 시청률 18%가 넘으면 쌍문동에서 1988년도 의상을 입고 싸인회를 열겠다는 주연 배우들의 공약도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1988년은 정치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에 변화가 본격화된 시기였다. '보통사람'를 내세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들끓었고 마이카 시대가 열림과 동시에 주식 붐과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무엇보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일군 한강의 기적을 전세계에 알린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된 역사적인 해였다.
서울올림픽 주제곡인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의 제1화 제목으로 시작한 ‘응팔’은 시청자들을 아무런 경계 없이 그 시절로 소환했다.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풍요롭거나 세련된 문화가 있지는 않았지만 돈보다 사람의 가치가 더 존중받고 이웃간의 정이 흘렀던 그때.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한지붕 세가족은 그 시절을 살았던 바로 우리네 이야기다.
사실 ‘응팔’은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에서 이미 성공을 거뒀던 복고풍에 여주인공의 ‘남편 찾기’를 통한 멜로 드라마를 엮은 기존의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이번에는 가족극의 요소를 강조하면서 시청층을 더욱 확대했고 이것이 전세대를 아우르는 인기 비결로 꼽힌다.
주인공 덕선(혜리)의 나이가 1971년생으로 현재 45세이기 때문에 젊은 연기자들 못지 않게 중장년층 배우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특히 ‘쌍문동 엄마 3인방’ 라미란, 이일화, 김선영은 초반부터 찰떡 호흡으로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했다. ‘응팔’이 이웃간의 정을 강조하면서 엄마들의 에피소드가 이전에에 비해 늘었고 이들은 주인공 못지 않은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렵게 살다가 둘째 아들이 산 올림픽 복권이 당첨되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졸부가 된 라미란-김성균 부부. 호피 의상만 고집해 일명 ‘치타 여사’라고 불리는 정환 엄마 라미란은 언뜻 까칠해 보이지만 이웃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챙긴다. 좋은 날 음식을 나누며 함께 기뻐하고 속상한 일도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한다. 집에서 방문 마사지를 받을 때도 늘 이웃 아줌마들과 함께이고 아버지와 둘이 사는 택(박보검)이 바둑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온 동네 사람들이 라미란네에 모여 잔치를 벌인다.
그런가 하면 선우 엄마 김선영은 주부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건드렸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선영이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당한 뒤 속상한 마음에 친정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말없이 우는 장면은 많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한 30대 ‘워킹맘’ 김모씨는 “처음에는 ‘응팔’에 공감할 거리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선영을 통해 주부로서 공감대가 생기고 드라마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응답하라’ 시리즈 1회부터 엄마 역으로 출연중인 이일화도 이번 시리즈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남편의 바가지를 긁을 때는 억척스러운 경상도 아줌마지만 운동권인 딸 보라(류혜영)가 경찰에게 잡혀가려고 하자 빗속을 뚫고 발에 피가 나도록 뛰어나오는 장면에서 인상적인 모성애 연기를 펼쳤다.
남편들의 선전은 중년 남성들까지 TV 앞으로 불러모았다. 덕선이 아빠 성동일의 코믹하지만 페이소스가 담긴 연기와 ’아이고~ 성사장 반갑구만 반가워요~‘ 등 1980년대 각종 코미디 유행어를 시도때도 없이 구사하는 등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친근한 김성균은 유쾌하면서도 때로는 코 끝 찡한 부성애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흥행 코드인 ‘남편 찾기’는 이번에도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제작진은 첫회부터 덕선(이혜리)의 2015년 현재의 모습으로 배우 이미연과 그의 남편으로 김주혁을 등장시켜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초반에는 덕선의 소꿉 친구들 네명이 모두 미래 남편감으로 떠올랐지만 현재는 김정환(류준열)과 최택으로 좁혀진 상황.
인터넷에서는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이라는 말까지 등장하며 팬들 간의 신경전도 만만치 않다. 물론 남편은 마지막회에서 공개되기 때문에 의외의 인물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세번 연속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그 시대의 향수를 제대로 자극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부활한 당시의 문화는 보는 이들에게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공감대와 더불어 경계심을 풀고 작품에 몰입하게 한다.
수학 여행 장기 자랑에서 흘러나왔던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덕선을 향한 정환의 마음을 표현한 이문세의 ‘소녀’, 선우(고경표)와 보라(류혜영)을 이어준 이선희의 ‘나 항상 그대를’을 비롯해 덕선과 택이의 해변 데이트에서 흘러나온 이정석의 '여름날의 추억' 등 적절한 시점에 흘러나오는 1980년대 인기 가요는 시청자들의 감성을 제대로 저격한다.
또한 청-청 패션에 앞머리를 둥글게 마는 헤어스타일과 ‘캡이지’, ‘웬열이야~’ 등 당시 유행어와 ‘실례송’으로 유명한 부채 도사 개그, 당시 TV에서 화제를 모았던 브라보콘 CF는 추억 여행에 빠지게 했다.
한 지상파 방송사 드라마국 CP는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복고는 드라마의 좋은 장치이고 미국에서도 최근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면서 “현재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른 40~50대의 추억을 자극하고 젊은층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따뜻함이다. 디지털 문명의 발달로 사람의 온기가 갈수록 줄어들고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주변 사람마저 불신하는 시대. 한해를 마무리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가족, 이웃, 친구간 서로를 위로하는 격려하는 따뜻한 정(情)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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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신문 제666호(201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