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종 철
오마이뉴스 경제부장
김정현씨라는 가상의 인물이 있다. 김씨는 경기도에서 무역중개와 가공업을 하고있다. 직원도 100여명에 달하고 연 매출도 500억원대에 이른다. 중국 등 신흥개발국을 상대로 사업 수완을 발휘해 매년 회사 이익도 많이 남기고 있다. 김씨는 해외에 100억원을 보내려고 한다. 미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대지만, 엄밀히 말하면 비자금이다.
이런 돈은 대체로 세 단계를 거친다. 우선 페이퍼 컴퍼니(장부만 존재하는 회사)를 만든다. 이 회사는 미국 델라웨어 주(州)나 버진 아일랜드 등에 이름을 둔다. 이들 도시에선 해당 기업에 대한 관리나 감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스위스 제네바 은행에 자신의 페이퍼 컴퍼니 회사 이름으로 계좌를 만든다. 이 역시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자, 이제 마지막이다. 김씨는 페이퍼 컴퍼니로부터 자문을 받았다며 자문료 명목으로 스위스 계좌에 돈을 보낸다. 이같은 자금이체는 말그대로 적법해 보인다. 은행들도 이 돈이 비자금이라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하루에도 수백만건씩 스위스와 여타 금융시장과 자금이체가 이뤄지고, 실제로 적법한 자금이체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실시간으로 판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김씨가 이번 거래로 얻는게 무얼까. 우선 위장 자문료를 지불함으로써 자신의 경기도 회사는 그만큼 수익이 줄어들고, 국내에서 내야할 법인세도 줄일수 있다. 또 그의 스위스 계좌의 돈은 국제 금융시장에 투자되면서 소득이 일어난다. 비밀계좌 턱에 우리 세무당국은 이 소득 조차도 잘 알수 없다. 김씨는 회사 법인세 뿐 아니라 개인의 금융소득도 빠뜨리면서 그만큼 세금을 덜 낼수 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매년 홍콩과 스위스 등을 오가며 자신의 계좌에 들어있는 돈으로 호화생활을 즐긴다.
김씨와 같은 가상 인물이 일부 만의 이야기일까. 그럴수 있다. 하지만 그 ‘일부'가 한 나라의 경제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하면서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지하경제'라는 용어의 개념을 두고, 정부와 학자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한 나라의 국부(國富)가 매년 수천억원씩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을 더이상 두고 볼수만 없었던 것이다.
세무당국도 매년 ‘역외탈세와의 전쟁'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김씨와 같은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다.
국세청의 역외탈세 조사를 통한 세금 부과 역시 매년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12년 202건에 8258억 원 추징을 시작으로 2013년에는 211건의 조사에 1조789억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이어 2014년에는 226건에 1조2179억 원이었고, 작년에는 223건에 1조2861억 원을 추징했다. 세무당국 나름대로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할수 있지만, 좀처럼 해외로 재산을 빼돌려 탈세를 하려는 사람들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문제는 국세청의 역외탈세 조사에 당사자들이 불복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국세청 자료를 보면, 지난 2014년 역외탈세 조사 226건 가운데 37건에 대해 조세불복 신청이 들어왔다. 37건에 대한 추징금액만 7940억 원이었다. 이는 국세청이 추징했다고 밝힌 1조2179억 원 가운데 65%나 달하는 금액이다.
게다가 지난 2010년 이후 2014년까지 국세청이 역외탈세로 세금을 부과해놓고도 추징하하지 못한 금액만 1조5000여억 원에 이른다. 그래서 국세청이 조사 실적 채우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부실 조사를 한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물론 세무당국의 탈세조사로 역외탈세를 뿌리뽑기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래서 정부도 국민들에게 스스로 ‘해외에 재산이 있다'는 신고를 받기도 했다. 지난 3월까지 자진해서 해외재산을 신고한 건수는 526건에 5129억원이었다. 이 과정에서 총 1538억원의 세금이 걷혔다. 이들에겐 과태료나 형사처분 등을 감경해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했다.
기자가 만난 정부 관계자는 "금융시장이 글로벌화되면서 더이상 돈의 흐름을 완벽하게 쫓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나라마다 복지 등에서 재정의 압박을 많이 받고 있다”면서 "매년 들어오는 돈은 뻔한데, 곳곳에서 훨씬 더 교묘하게 돈 들이 줄줄 새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조세 회피(또는 조세 도피)를 통한 부의 이전 문제는 세계적인 관심사가 됐다. 유럽 재정위기의 핵심에 조세 도피처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몇년 사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선 역외탈세를 막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다.
프랑스 은행들은 십수년전 부터 고객들이 취한 소득과 관련해 은행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프랑스 세무당국에 제공하고 있다. 적어도 프랑스에선 은행을 통한 조세포탈 자체가 불가능하게 됐다. 유럽의 경제학자를 중심으로 이같은 시스템을 조세도피처에 있는 은행들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만 된다면 세계 갑부들의 집단적인 조세 포탈을 얼마든지 규제할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들 조세도피처의 은행과 해당 국가들이 협조를 할 것이냐다. 이들의 협조 없이는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 소위 강대국의 강력한 무역제재를 포함한 ‘채찍'과 투명한 금융거래를 통한 이익창출이라는 ‘당근'도 나와야 한다.
미국은 뒤늦게 ‘금융정보자동교환협정(FATCA)'을 다른 나라들과 체결에 나서고 있다. 서로 자국민의 계좌와 이익 등 금융정보를 자동으로 교환해 ‘역외 탈세'를 막자는 것이다. 이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54개국이 서로 협정을 체결해 발효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협정을 맺었지만, 아직 국회 비준을 받지 못한 상태다. 지난 19대 국회때 의원들의 무관심(?)속에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었다. 올해 9월까지 FATCA가 비준이 안될 경우 미국에 합법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세금폭탄을 맞게 될수도 있다. 반대로 매년 수조원의 돈을 불법적으로 빼돌리고, 김씨처럼 그들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희소식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선택해야할 세상은 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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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신문 제677호(201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