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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338]
덫에 걸린 금리정책] '돈맥경화'푸는 것이 더 시급
[중앙(2005.1.13)]

 은행 예금 금리에서 물가상승분을 뺀 실질금리는 이미 마이너스로 떨어졌지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여전히 돈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가 금리 외에는 뾰족한 경기 활성화 대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은행들이 부실을 우려해 신용이 낮은 고객에 대한 대출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금리 인하에도 경기 침체 지속으로 돈이 필요한 곳에는 자금이 제대로 흘러가지 못하는 '돈맥(脈)경화'가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 돈을 빌려줄 만한 곳이 없다=A은행의 서울 강남지점장인 김모(49)씨는 요즘 넘치는 돈을 굴리지 못해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거래하던 대기업들이 줄기차게 대출을 상환하는 바람에 남아도는 돈을 운용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김 지점장은 "그렇다고 영세한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도 없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데 소신껏 돈을 빌려줬다가 떼이기라도 하면 본점에서 문책받는 것은 물론이고 지점장 자리를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B은행의 서울 명동 지점장인 이모(51)씨도 요즘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최근 2~3년간 주된 대출 대상이었던 소호(SOHO)업자 중 상당수가 사업을 접으려 해 대출고객 관리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들 업체는 장사가 되지 않자 사업을 키우기보다는 현상 유지에 만족하거나 문을 닫기 일쑤여서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는커녕 기존 대출을 갚겠다고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장은 "기업들이 투자를 통해 소기업에서 중기업으로, 중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올라갈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어도 투자할 생각을 안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중 자금력이 탄탄한 기업은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현금을 쌓아둔 채 아예 '은둔'상태다. 상대적으로 신용과 기술력이 떨어지는 기업들만 은행 문을 두드린다고 은행들은 하소연한다. 돈을 빌려줄 만한 곳은 돈을 쓰려 하지 않고 위험이 따르는 기업들만 은행을 찾는다는 설명이다.

◆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다=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데도 돈이 돌지 않는 것은 지난해 하반기 기업과 가계의 은행 대출 감소 현상에서 확인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대기업은 지난해 1분기에는 대출을 1조2000억원 늘렸으나 2분기부터는 연말까지 3분기 연속 대출을 줄여나갔다.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대기업들은 지난해 빚 갚기에 열을 올렸고, 그 결과 부채 비율이 미국보다도 낮은 100% 아래로 떨어졌다.

지난해 4분기에 중소기업에 대한 은행 대출은 5조7000억원, 개인사업자 대출은 9000억원 감소했다. 한은이 8월과 11월 두 차례나 콜금리를 낮췄는데도 은행 대출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은행들이 부실을 우려해 중소기업과 개인에 대한 대출을 크게 줄인 것이다. 서강대 김병주 명예교수는 "금리를 한껏 낮췄지만 자금 흐름이 막히면서 금리 인하의 영향력이 떨어진 증거"라고 지적했다.

대기업의 자금 수요가 줄고 부동 자금이 증가하면서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전체 통화량 증가폭도 작아지고 있다. 개인들이 소지한 현금과 은행.증권.보험 등 모든 금융기관이 보유한 예수금을 합한 개념인 총유동성(M3)은 2002년에 10%대의 월별 증가율을 보였으나 올 들어선 5% 후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은 통화금융팀 김인섭 차장은 "정부 지출 확대에도 불구하고 경기 부진과 민간에 대한 대출이 저조해 통화량 증가율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금리가 낮은데도 자금이 돌지 않으면서 소비와 투자는 줄이고, 현금으로만 보유하려는 유동성 함정의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전효찬 수석연구원은 "일본에서는 제로금리가 계속되면서 시중에 부동 자금만 늘어났다"며 "돈이 돌지 않으면 일본과 유사한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리를 낮추면 주가가 오르기 때문에 증시로 자금이 몰린다는 공식도 깨졌다. 주식 투자 자금을 나타내는 증시의 실질예탁금은 2003년 2분기부터 7분기 연속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빠져나온 돈은 머니마켓펀드(MMF) 등으로 몰려 지난해 말 만기 6개월 미만의 부동자금은 400조원 규모로 불어났다.

부동산시장 안정 정책에 따라 돈이 부동산으로도 돌지 못하면서 주택 가격이 하락하는 것도 돈 흐름을 더욱 경색시키고 있다. 금융연구원 신용상 연구위원은 "금리 인하에 그치지 말고 돈이 실제로 필요한 쪽으로 흘러가는 구조가 작동하도록 정부가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돈맥경화' 대책은

꽁꽁 언 부동산 시장 규제 풀어야

저금리의 효력을 살려 경제가 활력을 되찾게 하려면 무엇보다 국내 소비를 진작시켜야 한다. 정부도 최근 접대비 실명제와 성매매 특별법 단속의 완화를 검토하는 등 소비 진작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소비를 억제하고 있는 규제를 좀더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가계 자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동산 시장의 규제부터 손질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파트 등 부동산값의 지나친 상승을 억제하고 보유세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도 거래 자체를 끊기게 해 막대한 돈이 잠기게 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JP모건 임지원 상무는 "실거래가 신고제 도입이 정치권의 논란으로 늦춰짐에 따라 상반기 내내 부동산 세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며 "부동산 등록세율도 낮췄지만 여전히 높다"고 말했다. 세금 등의 부동산 거래 비용이 높은 상황에서는 거래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주택담보대출의 만기를 장기화해 가계의 이자 부담을 줄이고 소비 여력을 늘려주는 조치도 필요하다. 지난해 주택금융공사 모기지론이 도입돼 최장 20년 동안 저리로 갚을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판매액은 아직 3조원대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해 11월 말 현재 주택담보대출의 전체 규모가 168조5000억원에 이르고, 올해 만기 금액만 46조3000억원인 데 비하면 미미한 실적이다.

특소세 등 이미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세금을 없애는 등 과감한 감세정책을 도입해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유동원 씨티증권 상무는 "세금을 크게 낮추지 않는 한 민간 소비가 상반기에는 제자리를 맴돌고 하반기에도 1%가량 늘어나는 데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부동 자금이 금융권으로 흡수돼 산업자금으로 공급되는 선순환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장기 투자상품에 대한 혜택을 늘려주는 조치도 필요하다. 외국어대 임기영(경제학)교수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적립식 펀드나 노후 대비 상품에 대해 소득 공제 등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혜택을 줘 가계 여유자금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투자처를 마련해주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도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정부가 신벤처정책을 도입한 지난해 12월 1583억원 규모의 7개 조합이 결성됐다. 정부의 지원정책이 마련된 한 달 동안 투자조합에 몰린 돈이 전체 조합이 1년간 공모한 금액의 30%에 달했다.

*** 주요국들은 금리 계속 올릴 듯

한국만 인하 고집 땐 자본 빠져나갈 가능성

최근 금리를 내린 한국과 반대로 다른 나라들은 금리를 올리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3년 넘게 금리를 내리다가 지난해 6월부터는 다섯 번이나 금리를 올렸다. 불황이었을 때는 금리를 낮춰 돈을 풀다가 최근 경기가 다시 살아나자 과감하게 정책 기조를 바꾼 것이다. 20여년 만에 최대 호황을 누리는 영국 역시 주택 가격이 상승하고 가계 빚이 꾸준히 늘자 지난해 금리를 네 차례 인상했다.

선진 주요국들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1년 전부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3년엔 미주.유럽.아시아의 주요 27개국 중에서 21개국이 금리를 내렸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돈을 많이 풀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지난해는 27개국 중 13개국이 금리를 올렸다. 한국은행 국제동향팀 신성우 과장은 "경기가 꾸준히 회복된 데다 유가가 오르면서 물가상승 압력이 높아지자 많은 중앙은행이 긴축 기조로 돌아섰고, 금리를 인상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올해도 이어질 전망이다. 한국은행은 미국의 기준금리인 연방기금금리가 현재의 연 2.25%에서 6월에 3%대로 오른 뒤 연말에는 3.81%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도 과잉 투자 등을 억제하기 위해 올해 금리를 더 올릴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중국은 지난해 과열된 경기를 식히기 위해 1년 만기 대출금리(기준금리)를 소폭 올렸다.

이처럼 외국이 금리를 올리는 상황에서 한국만 홀로 금리 인하를 고집하면 경기 회복엔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다른 부작용만 나타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높은 금리를 찾아 투자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전주성(경제학과)교수는 "자본 이동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금리정책을 펼 때 국제 금리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물가는 오르는데 명목금리가 이에도 미치지 못하는(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 상황이 계속되면 고수익을 원하는 자금이 부동산 등으로 흘러가 거품을 만들 수도 있다.

 [조회: 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