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양에 사는 주부 정모(38세)씨는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남편의 수입이 조금 줄었지만 큰 걱정 없이 지내고 있다. 아파트 두 곳에서 들어오는 80여 만원의 월세로 애들 학원비를 충당하고 생활비까지 보태고 있다.
불과 3년여 전만 해도 정 씨는 평범한 주부였다. 24평짜리 아파트에 등붙이고 살았지만 적금 붙기에도 빠듯할 정도로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그녀가 수십 만원의 고정 수입을 얻는 임대사업자로 변신한 것은 지난 2001년. 당시 집값이 큰 폭 뛰기 시작하자 정 씨는 적금을 깨고, 대출을 받아 평촌에 32평형짜리 아파트를 샀다.
한 달이 조금 지나 2000만원 가까이 집값이 뛰자 이번에는 은행 대출을 받아 일산에 전세 끼고 30평형대 아파트를 하나 더 사들였다. 2년여 만에 아파트 값은 두 배 가량 뛰었고, 지금은 은행 대출을 갚고 세를 놓아 매달 80여 만의 월세를 챙기고 있는 것이다.
최근 3년여 동안 주부 정 씨 같은 사람을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아파트를 여러 채 사서 목돈을 벌지 않았더라도 대출 끼고 집을 장만해 전세를 탈출한 사람이 적잖은 까닭이다. 이들은 대부분 대출원금과 그동안 낸 이자를 제외해도 자산은 예전의 곱절로 불어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투기판의 `실탄`
투자든, 투기든 아니면 도박이든 `실탄`이 넉넉해야 승산이 높다. 자금이 곧 실탄이다. 주택투자에서 주택담보대출은 곧 실탄이다. 집을 맡겨 집을 사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3년간 안하면 `바보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반화된 것이다.
집값이 은행금리를 수십배씩 초과해서 급등하는 바람에 집을 담보로 대출받는 돈으로 다시 집을 사면 대출이자를 내고도 막대한 차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1년의 경우 서울 아파트 값은 1월 하락세를 마감하고 상승세로 접어들면서 상반기에는 매월 1%대의 상승세를 보이다 하반기들어는 2%대로 급격히 튀어 올랐다. 그해 한 해 동안 서울 아파트 값은 평균 19.3%, 2002년에는 30.8%나 상승했다.
집값 폭등은 외환위기발 집값 폭락에 대한 반발심리가 촉발하고 낮은 금리가 뒷받침한 것이다. 2001년 당시 은행의 가중평균 주택담보대출 이자는 연 6%대에서 지난해 말 5%대로 떨어졌다.
평균값으로만 계산해도 2001년 1억원을 대출을 받아 2억짜리 집을 샀다면 2년간 이자 1200만원을 빼고도 대략 8000만원 이상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저금리는 평범한 주부들까지 `투기 파티`에 뛰어들게 했다. 인터넷이 주식시장에 개미들을 끌여 들였다면 주택시장엔 저금리가 개미 투자자들을 불러들인 셈이다.
하지만 대출은 때에 따라 독이 되기도 했다. 지난 1998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주택담보대출 이자는 연간 20%를 뛰어 넘었다.
1억원을 빌렸을 때 매달 갚아야 하는 이자만 160만원을 넘었다. 대출을 끼고 집을 산 사람들은 투자 이익은 고사하고, 이자마저 감당하지 못해 경매로 집을 넘겨야만 했다. 수익은 고사하고, 원금마저도 까먹고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부 관리권에 든 주택대출
주택담보대출은 97년 12월 시작된 외환위기 전까지는 통화당국의 관리권 밖에 있었다. 은행들 역시 가계보다는 기업대출에 주력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전후로 상황이 급변했다. 기업들의 부도가 속출하면서 은행들이 상대적으로 부실리스크가 적은 가계대출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주택담보대출 판매에 경쟁적으로 매달렸다.
집값 폭등으로 대출 수요도 많았고, 담보물도 확실해 떼먹힐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출 경쟁이 심화되면서 당시 대출액은 아파트 시세의 100%까지 근접할 정도였다.
국민은행 연구소 김정인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전까지 기업 금융에 주력해 주택대출은 주택은행의 국민주택기금 대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며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기업대출 축소에 따라 대안으로 주택대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통화당국도 이때부터 담보대출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국 정유성 차장은 "2001년 하반기부터 금융감독원 회계처리 방법 세분화해 가계대출 항목에 담보대출을 별도로 게재해 보고토록 하면서 통계로 관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주택담보대출은 급기야 집값을 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국민은행 리테일상품팀 황선익 차장은 "저금리는 계속되는 데다 집값이 계속 오르자 2002년 9월부터 투기지역 및 투기과열지구에서 대출 비율을 40∼60%로 낮춰 조절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분양권 전매나 청약통장 1순위 제한 등 수요 규제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잡히지 않자 정부가 실탄의 보급을 줄여 버린 셈이다.